일본 교토 은각사(銀閣寺)를 한 바퀴 돌다

 

교토역 근방에서 탄 버스가 은각사전(銀閣寺前) 정거장에 도착했다. 버스 차창으로 본 하늘은 흐려 있었다. 안개비인지, 는개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비가 마중해 주었다. 어쩌면 는개보다 조금 큰 알갱이를 가진 이슬비 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차선의 질서정연한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철학자의 길. 일본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거닐던 산책로였단다. 시인인 내가 걷는 이 길은 ‘시인의 길’이 될 터였다. 개울가로 뻗어있는 벚나무 가지로 보아 봄이면 이 개울이 사람들도 넘쳐나 발 디딜 틈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 피는 개울, 거기에다 철학자의 길이라니...

개울에 걸쳐져 있는 다리는 은각사교였다. 이곳은 모든 게 은각사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은각사 앞 도로는 한산했다. 너무 일찍 은각사로 와서인지 그제서야 가게들이 문을 열고 상품을 진열하느라 분주한 손길을 보탰다.

교토의 다른 거리에 비해 이곳은 몇 개의 소박한 가게가 있었다. 시끄럽고 화려한 포장지 속에 숨어 있는 상품 찾기가 미로 찾기와 다름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전날 청수사에 들렀다가 사람 인파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서 소박함이 마음에 들었다. 나지막하게 펼쳐진 언덕길을 걸어 은각사 출입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검은 돌로 포장된 길이 나왔다. 길 양옆으로 몇 그루의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 크기로 보아 몇 년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오래된 절 입구부터 아름드리 느티나무, 소나무가 압도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도 소박했다. 그 옆에 큼직한 안내판이 반겨 주었다.

 

총문은 우리나라 중문 크기로 아주 작았다. 우리나라 솟을대문 보다 오히려 작았다. 닌젠지 삼문을 보고 난 뒤여서 초라하기까지 했다. 닌젠지 삼문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이 총문에는 은각사에 재앙을 가져오는 악귀가 못 들어오게 막는 금줄장식으로 불리는 시메카자리(注連飾り)가 달려 있었다. 절이지만 민속적인 풍습을 따르고 있었다. 교토의 대부분의 집 대문이 이 시메카자리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총문에서 이어지는 길을 참도(參道)라고 했다. 우리네 왕릉에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을 참도하고 하는데, 여기에선 은각사 총문에서 중문까지 이어진 길을 가리켰다.

이 참도가 독특했다. 일본의 높다란 성곽을 닮은 동백나무 울타리가 펼쳐져 있었다. 오른쪽엔 치자나무 울타리였다. 동백나무와 치자나무라? 그 조화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흰동백꽃과 흰치자나무꽃이 비슷해서 일까? 그런데 이곳의 동백은 붉었다. 십이월 겨울인데 드문드문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붉은 동백꽃이 겨울동안 피고, 치자나무꽃은 초여름에 피어나니까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높이가 오십여미터 정도 될까. 옆으로 자라는 가지들을 잘라 질서정연하게 다듬어 놓는 인위적인 담이었다. 이 참도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빽빽한 왼쪽 동백나무 담 아래에는 대나무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대나무담이라?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다. 이 참도의 길은 마사토로 덮여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걷는 마사토 길이었다.

 

이 참도를 벗어나자 중문이 나오고 입장권을 끊어 본격적인 은각사 경내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흰모래밭이었다. 뜨락엔 갈퀴로긁어서 물결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모래 물결무늬가 압도했다. 은사탄(銀沙灘)! ‘은빛 모래가 펼쳐진 개울’, ‘비단 거울 못’이라니... 모래가 마치 비단처럼 은각사를 감싸며 펼쳐져 있다는 뜻이었다.

 

이 은사탄을 감상하기 전에 은각을 먼저 감상해다. 은각(銀閣), 은으로 입혀 은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은으로 칠을 하지는 않았다. 소박한 이층 누각이 금경지를 끼고 서 있었다. 은각이지만 관음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은각으로 들어가는 곳엔 큼직한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옛 은각사 스님들은 게다짝을 끌고 이 돌다리를 건너 다녔을 것이었다. 은각 관음전의 일층은 툇마루로 맨발로 금경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 놓았다. 우리나라 한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툇마루, 고상마루, 누마루이다. 이곳에서도 툇마루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다. 여러 창문들이 연이어 있었다. 이 문들은 가운데 두 짝을 양쪽으로 밀어 열었다. 그러면 가운데가 환하게 열려 두 칸의 다다미방에서 금경지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일층은 심공전(心空殿), ‘마음을 비우는 전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층은 꽃모양의 창틀이 아름다웠다. 아치형 창문이 세 개가 나란히 있고, 누마루를 닮은 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이곳에 나와 금경지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일층에서 바라보는 전경과 이층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미묘한 차이가 있을 터였다. 이 은각에서 바라본 풍경을 가리켜 ‘한아(閒雅)’라고 했다. 아주 단아하고 품격있는 풍경이라고 할까? 그 위엔 일본식의 너와지붕이 고풍스러웠다. 고케라부키(柿葺). 편백나무 껍질을 얇게 켜서 얹어 놓은 지붕이 독특했다. 우리나 너와지붕은 떡갈나무 껍질인데 편백나무 껍질이어서 향도 그윽할 터였다. 이층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기에 이 전각이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전혀 절 같지 않지만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엄연한 절이었다. 이 은각 꼭대기에는 금동봉황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방향이 동쪽을 향해 있었다.

은각 관음전 옆에는 일본에서 너무도 흔하게 보는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관음전과 신사라니... 미묘한 조화랄까. 일본인들의 신앙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담장으로 이어진 길을 걸으면서 은사탄을 감상했다. 은사탄의 두께는 60센티미터가 된다고 했다. 이 은각사 어디에 이렇게 많은 모래가 있었을까? 굵은 모래, 우리나라 금모래하고는 그 모양이며 색깔이 달랐다. 석영이 다량으로 포함된 백천(白川)인 시라카와 모래와 사장석(斜長石)을 잘게 부셔 이를 섞어서 만들었다.

 

 

은사탄 가장자리에는 향월대(向月臺)라는 원뿔 모양의 모래탑이 있었다. 아마도 핵발전소 냉각탑 모양도 이 향월대를 닮았다. 높이가 아주 큰 사람 키인 180 센티미터나 되었다. 이 향월대는 일본의 후지산을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향월대나 은사탄에 은은하게 달빛이 어리었다가 반사되면 그 풍광이 기가막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향월대에 앉아 달빛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향월대에 올라앉으면 당장에 허물어져 내릴 터여서 그저 해보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방문한 이 날은 이슬비가 내리는 날이기도 했고, 밤이면 은각사에서 퇴출이 되어야 했기에 그 경치는 그림의 떡이었다.

은사탄은 한 줄은 반듯하게 정리해 놓았고, 다른 한 줄은 갈퀴로 긁어 놓아 추상화 같은 그림을 연출했다. 이 은사탄 관리와 향월대를 관리하는 동붕중(同朋衆), 직업이 수백년을 이어져 왔다는 데에 감탄을 했다. 오로지 이 한가지를 구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니... 비가 세게 오면 향월대는 무너져 내릴 것이고 은사탄은 그냥 밋밋한 모래밭이 될 것이었다. 그걸 일일이 갈퀴질을 하고 동그란 원형탑을 만들고 내려와서는 발자국을 전혀 남기지 않는 기술이 거기에 있었다.

절에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닮은 은사탄을 깔아 놓은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정원에 바다며 강, 계곡, 폭포 같은 것을 모두 가져다 놓으려는 문화 같았다. 나무뿐 아니라 모래, 인공 언덕, 연못, 냇물, 폭포 등이 일본 특유의 미학(美學)이었다.

강이나 개울가에 정자를 짓고 인공적인 것을 배제한 우리네 정원 문화하고는 뭔가 차원이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정원이라는 낱말도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1873년 일본에서 출판된 정원기(庭園記)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정원이라는 말이 언급되었다. 우리나라는 보통 정원(庭園)을 원림(園林), 임천(林泉), 정원(庭院) 등으로 불렀다. 이같은 용어들이 일제 강점기에 사라지고 정원(庭園)이라는 용어로 고착화 되었다. 이처럼 언어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은각사 정원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설계가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처럼 깊은 계곡이나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없는 교토에선 고육지책으로 바다며 개울, 폭포 등을 집 뒤뜰이나 앞뜰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게 일본의 정원 문화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번째 은사탄과 향월대를 구경했을 때는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는 것이다.

 

은사탄을 지나니 동구당이 나왔다. 동구당은 단층이었다. 은각 관음전의 아름다움에 비해 조금 격이 떨어진다고 할까? 하지만 금경지로 이어지는 연못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했다. 동구당이라는 이름은 육조단경 ‘동쪽 사람은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서방에서 태어나기를 바란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 동구당 북동쪽엔 다다미 네 장반으로 이루어진 동인재(同仁齋)가 있었다. 이 동인재는 ‘인(仁)을 함께 나누는 공간’으로 서재이자 다실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시회와 다회를 열었다. 보통 동산문화로 불리는 무대이기도 했다.

이 동인재는 쇼인즈쿠리(書院造り)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방에는 장지 바로 앞에 글을 쓸 수 있는 탁자가 설치되어 있어 시회가 열린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동인재에서 장지문을 열면 바로 연못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돌다리가 놓여져 있어 연못 가운데에는 대내석(大內石)이 있었다.

이 동구당을 구경하고 히가시야마 동산을 올랐다. 순로(順路)라고 표시된 팻말을 따라 걷다보니 조망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교토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은각사에서 살았던 요시마사는 자주 이곳에 올라 넓게 펼쳐진 교토 풍광을 감상했을 것이었다.

은각사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처음 마주한 풍광이 눈에 익숙해져서인지 그 감동이 조금 사그러 들었다. 한 바퀴 더 돌지 않았다면 처음 만난 은각사 풍광에 대한 이미지가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내 머리 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글 · 사진 : 한도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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