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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아래, 당하리, 당아리, 양지마을을 찾아라!신성한 우물인 밑우물이 있던...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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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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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한 우물인 밑우물이 있던

      당아래, 당하리, 당아리, 양지마을을 찾아라!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당아래 양지마을에 밑우물이 있었다.

당아래 마을은 부천종합운동장역에서 조금 서쪽으로 위치한 곳에 있다. 당아래 지하차도 서북쪽에 당아래 마을로 들어가는 길주로 463번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마을 구경을 하면 된다. 마을길이 구불구굴 한 걸로 옛마을의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아직 집 몇 채는 그나마 단독주택으로 70~80년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어 있던 탓에 일정 부분 보존이 되어 있다.

하지만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단독주택들을 헐어내고 빌라 몇 채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들어섰다. 이곳까지 집장사 혜택이 주어진 셈이다. 마을 앞으로 다본다주식회사, 모세티앤에스, 바른바스플랜 등 회사가 들어와 있다.

길주로 건너편에는 하이카프라자 춘의점, 대영공사, 삼정스텐부속, KCC태광판넬, 두영모터스, 1급금강모터스 등의 공장들이 포진해 있다. 일반적으로 춘의공단으로 불리는 곳의 일부분이다. 땅 가진 이들이 전통 마을인지 공장지대인지 분간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탓이다.

당아래 마을을 가로질러 점말, 성골, 멧마루로 가는 길이 뚫려 있다. 지금은 점말, 성골, 멧마루에서 오는 지름길로 쓰이는 일방통행 길이다. 소명지하차도에서 시작한 원미로의 끝지점이다. 당아래 지하차도에서 한 번 끊기었지만 지도상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미로를 가리켜 당아래고개길이라고 한다. 당아리고개라고도 한다. 원래는 구룡목고개, 구렁목고개이다. 이 당아래고개는 해발 42m 정도 되고, 양지마을 아래인 당아래경로당 지역은 해발 22,2m에 달한다.

매봉재 동쪽 봉우리인 춘지봉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춘지봉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산길이 있다. 산길에서 바로 만나는 마을이 당아래마을 중에서 첫 번째 마을인 양지마을을 만난다. 마을 가운데에 밑우물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다. 지금은 길주로 463번 길로 편입이 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삼거리 길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춘지봉 산자락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였다.

밑우물은 춘지봉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춘지봉 밑에 있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고리울의 찬우물과 같이 우물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양지마을에서 춘지봉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작은 옹달샘 같은 우물이었다. 보통 마을 공동우물, 대동우물은 그 깊이가 제법 된다. 하지만 밑우물은 자연적으로 생긴 우물이어서 그 깊이가 낮았다. 상수도가 설치된 1984년 이전까지 마을 주민들의 생활용수로 이용되었다.

당아래 너머 안골에 위치한 여월정수장이 1981221일자로 인가가 났다. 하루 5만 톤급의 원수를 정수하는 정수장 시설이 완공된 것이다. 이후 19831216일 매봉재의 매봉 아래 산자락에 도당배수지 12,300준공이 되었다. 밑우물이 있던 양지마을엔 그 뒤에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수돗물을 먹을 수 있었다. 당아래 마을인 양지마을이 그린벨트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양지마을에 있는 밑우물에 관련해서 설화 한자락이 전한다.

밑우물은 옛날에 아주 유명한 약수였다. 부천에서 몇 군데 유명한 약수터가 있지만 이곳 밑우물도 근방에서 유명했다. 이 밑우물에 사대부집 규수들이 쌍가마를 타고 와 약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리곤 하였다.

하지만 양지마을에 이사를 온 한 아낙이 밑우물에서 흘러나온 물로 똥걸레를 빨았다. 신성한 우물에서 똥걸레를 빠는 것은 부정을 불러들이는 짓이었다. 옛날부터 우물은 마을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우물제를 지내 부정을 막았다. 그래서 부천의 멧마루에선 멧마루 우물제를 해마다 지내곤 했다.

똥걸레를 빤 뒤 밑우물의 물맛이 변해 버렸다. 부정을 타버린 것이다. 수많은 까치떼가 날아와 밑우물 주변에 우글거리던 떼뱀을 잡아먹기도 했다. 까치들이 뱀들을 물고 날아가기도 했다. 늘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가 뱀까지 물고 날아가자 마을 사람들은 늘 모여 탄식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예전의 약수터 물맛을 영영 회복하지 못했다. 양지마을 주민들은 밑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아 빨래나 하는 허드렛물로 사용했다.

양지마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식수를 위해 우물을 새로 파야 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새로 판 우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천향토문화대전 인용

 

당아래고개를 넘어 가운데당아래로 간다. 당아래고개에서 동쪽으로 작은 소로가 뚫려 있다. 가운데 당아래 마을로 가는 길이다. 가운데당아래는 정말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겨우 몇 채 집이 있다. 세 마을 중에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가운데당아래이다. 전주이씨 화의공파, 원주원씨, 수성최씨가 혼재하여 촌락을 이루고 살아왔다.

마지막 너머당아래는 현재 부천종합운동장역에서 동쪽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두 채의 집이 있다. 이 지역이 너머당아래이다. 이렇게 복잡한 마을로 불리웠지만 지금은 당아래 마을로 통일되어 있다.

가운데당아래, 너머당아래는 마을이 커지면서 불어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는 양지마을 하나였지만 집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덩달아 마을도 커진 것이다. 그래서 가운데, 너머라는 마을 이름이 생긴 것이다.

 

옛지도에서 살펴본 당아래 마을

일제강점기 때인 대정8(1919) 325일 인쇄한 경성3호 지형도를 보면 당아래는 당하(塘下)로 되어 있다. 당아래 마을에 대한 어원풀이를 할 때 상세하게 해설을 하겠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적으로 벌어진 신작로 사업으로 인해 당아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당아래고개인 구룡목고개를 넘어온 길은 당아래 마을 앞에서 조마루를 거쳐 벌말로 가는 길, 바로 벌말로 가는 길, 당아래에서 겉저리인 표절리 마을로 길로 나뉘었다.

이 지형도를 보면 양지마을, 가운데당아래, 너머당아래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춘지봉 아래에 몇 채 집이 있고, 그 사이로 당아래고개로 신작로가 뚫려 있다. 이곳에 몇 채의 집이 있고, 조금 거리를 두고 세 채 정도의 집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 너머당아래이다.

1977년도 6월에 인쇄한 지도를 보면 마을 이름이 당아리로 되어 있다. 고개 이름도 당아리고개라고 표시되어 있다, 당아리 마을 깊숙한 곳에는 양계장이 자리를 잡았다. 이 양계장이 있는 곳은 현재 빌라가 신축되어 있다.

신작로 건너에는 마을회관이 자리를 잡았고, 신일화학, 우진통상, 신우정밀 등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앞논들이라고 이름 붙여진 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지도에 보면 당아래고개 너머에 여러 채의 집이 있고, 안골로 관통하는 길이 뚫려 있었다. 보통 내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우리말로는 안골로 불린다. 골짜기 이름도 안골이고, 마을 이름도 안골이다. 현재는 이곳에 작은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화진산업, 최승광최강해물손칼국수집이 있다. 오른쪽에는 꽃가게가 연이어 있다.

   
 

당하리(堂下里)의 뜻?

1789년도에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당하리(堂下里)로 되어 있다. 어찌보면 최초로 기록된 문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주소는 부평부(富平府) 옥산면(玉山面) 당하리(堂下里).

조선 초기에는 부평부 옥산면엔 범박리, 괴안리, 소사리, 역곡리가 속했다. 당하리가 없었다.

이후 호구총수에 기록이 올라 있다. 이때 옥산면의 인구는 200호에 774명이 살았다. 이를 다섯 개 리로 나누면 각 40호에 149명 정도였다. 제법 큰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하리 마을이 양지마을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집들을 포함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당하리(堂下里)라는 땅이름은 양지마을 토박이로 오랜 세월 살아낸 청주한씨 이양공파 족보인 청주한씨이양공파세보(1960년 발간)에 기록되어 있다. 청주한씨 이양공파 28손 한수현(韓壽鉉, 1825~?)의 묘소의 위치, 29손 한인원(韓仁源, 1851~1896)의 묘소가 당하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주한씨와 더불어 양지마을에 살아온 원주원씨인 원세현(元世玄, 1867~1943)의 묘소가 당하리에 위치한다고 기록한 원주원씨족보(1985)도 있다.

당하리(堂下里)에서 ()’은 도당(都堂)을 가리킨다. 이 도당(都堂)은 서낭당, 성황당(城隍堂) 등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여러 당집 중에서 으뜸이 되는 곳이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도당신(都堂神)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도당이 지난 80년대까지 양지마을에서 여월리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양지마을에서 구룡목고개를 넘어 점말의 봉골인 봉황골을 지나 여월리 가는 길이었다. 매봉재의 산줄기와 장자봉산 줄기가 만나는 곳에 구룡목고개가 있었다. 그 구룡목고개의 장자봉산 산줄기에 위치해 있었다. 도당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안골 마을 못 미쳐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당하리는 이 도당이 있는 곳에서 아래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919년 지형도엔 당하(塘下)?

대정8(1919) 지형도에 표시된 당하(塘下)는 무슨 뜻인가? 조선시대 오랜 세월 동안 당하리로 불려오다가 느닷없이 당하로 바뀌었다. 뒤에 마을 리()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 지형도를 조사할 때 양지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말이다. 조선지지자료에 이 당하(塘下)는 기록조차 되지 않다.

그러므로 당하리의 당(), 당하의 당(), 도당(陶唐) 마을의 당()은 같은 뜻으로 익힌다. 도당마을이 도당리(都堂里)에서 도당리(陶唐里)로 변천한 것처럼 당하리(堂下里)가 당하(塘下)로 변모한 것이 같다. 그러기에 당(), (), ()언덕이나 둑, ()’을 가리킨다. 당하리, 당하는 산언덕에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 된다. 또는 둑이 있는 곳의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1970년대 당아리의 뜻은?

당아리는 그럼 뭘까? 위의 말과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아리는 껍데기의 옛말이다. 깍정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열매의 껍질을 가리킨다.

이 당아리가 겉저리인 표절리로 바뀌었다. 이 겉저리에서 이 갗에서 유추되지만 당아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 껍데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동벌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중동벌에서 멀리 떨어진 것은 조선시대 빈번하게 벌어진 서해조수와 관련이 있다. 서해조수가 굴포천 상류까지 밀고 올라와 농사 짓는 일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기 일쑤였다. 그러기에 사람 사는 마을은 멀리 떨어지거나 산언덕에 위치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 겉저리는 나중에 생긴 마을이고 원래부터 있던 마을은 당아리로 여겨진다. 이 당아리가 나중에 겉저리, 표절리로 바뀌어 나간 것이다.

양지마을의 의미는?

동네는 대부분 햇빛이 드는 동편에 형성된다. 풍수지리에 의해서 마을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양지마을이란 햇빛이 잘 드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장자봉에 도당할아버지 신당이 있어서 양지마을이 단순하게 햇빛이 마을이라는 해석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자로는 양지(陽地)여서 을 의미한다. ‘는 장소를 의미하므로 태양신을 모시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즉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마을임을 뜻한다. 양지마을은 바로 곁에 있는 풍무골과 그 뜻이 같다. 풍무골은 당아래 마을에서 춘의사거리로 오는 곳에 위치해 있는 골짜기였다. 옛낫소 공장이 있던 곳에서 뻗어나온 곳이다. 지금은 스와니가구백화점, 부천충전소가 있는 근방에서 시작된 골짜기이다. 이 풍무란 밝암으로 밝은이라는 말이다. 양지마을에서 양지와 그 뜻이 같다.

범박마을에 있는 양지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밝사상, 한밝사상이 땅이름에 녹아 있다. 전국 곳곳에 이 밝음을 가리키는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이란 밝음을 뜻하는 말이다. 하늘에 높게 떠 있는 태양, (), 옥황상제, 광명, 불 등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근원이어서 일상생활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천의 땅이름에도 이 밝사상이 짙게 깔려 있음은 여러 땅이름을 통해 드러난다. 당연히 전국의 땅이름도 우리민족의 고유의 사상에 근거에 지어진 것이 아주 많다. 전국 대부분의 마을마다 태양신이면서 마을을 지켜주는 도당신을 섬기었다. 그러기에 마을을 지키는 도당신을 모신다는 뜻의 당하리하고 양지마을하고 그 뜻이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하겠다. 산이나 둑의 아랫마을이라는 뜻하고 이중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당아래는 당은 그대로 쓰고 아래 하는 우리말로 쓴 것에 불과하다. 당하리, 당아리, 양지마을, 당아래 같은 말을 널리 쓰면 좋겠다. 이 중에서 하나면 고르라면 당아래이다. 당아리는 겉저리로 진화해서 쓰여서이다. 당하리는 당아래하고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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