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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루 땅을 점령해간 일제의 부재지주 - 논과 밭, 임야 약탈에 혈안이 돼
한도훈 (시인, 부천 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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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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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마루에는 조씨가 많이 살지 않았다.
조마루에 조씨가 많이 살지 않았다. 1912년도 경기도 부평군 옥산면 조종리의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조씨는 조기번(曺基番)씨 단 한 사람이었다. 조기번씨는 조마루 지번 중에서 58번지 68평, 94번지 457평, 116번지 480평을 소유했다. 총 1,005평이다.
조마루에 살지 않고 경성부에 살던 조덕승이라는 사람이 부재지주로 등재되어 있다. 경성부(京城府) 서부(西部) 반석방(盤石坊) 포동(布洞)의 조덕승(曺德承)은 지번 100번지에 논 2,256평. 167번지에 논 2,932평을 소유했다. 총 5,188평에 달하는 대규모 농지를 소유했다. 거기에다 깊은구지에 살면서 부재지주인 조중권(趙重權)씨가 7번지 1238평, 30번지 54평을 소유했다.
조마루가 조씨 집성촌이 아니라는 얘기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도 생산한 부천군 계남면 조종리 토지 현황이 당시 조종리에 살고 있던 이들을 알려주는 일차 자료이다.
당시 조종리에 속한 지번은 1번지~ 208번지까지였다. 이 지번 소유주 중에서 조마루에 살고 있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강문영(姜文榮), 강치성(姜致成), 김창성(金昌成), 이만조(李萬祚), 이복삼(李福三), 송구선(宋求先), 이식용(李息鎔), 송영선(宋英先), 송영순(宋英順), 이원용(李元鎔), 이원춘(李元春), 이용순(李龍淳), 이용호(李龍鎬), 최용서(崔用西), 이은용(李恩鎔), 이인선(李仁善), 임경준(林敬俊), 조기번(曺基番), 차원실(車元實), 홍승조(洪承祚), 홍우익(洪祐益) 등이다.
나머지는 표절리, 심곡리, 여월리 등 부천 타지역에서 소유한 부재지주였다. 서울 용산리, 인천 등에 살고 있던 부재지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1912년 조마루 토지조사부

● 조마루 땅을 점령해 간 일본인 부재지주
여기에 일본인 부재지주도 있었다. 인천부의 이세덕삼랑(伊勢德三郞)이 8번지에 밭 171평, 24번지에 논 49평, 25번지에 논 338평, 26번지에 밭84평, 27번지에 논 328평, 78번지에 논 1,297평, 79번지에 밭 42평을 소유했다. 총 밭은 297평, 논은 2012평을 소유했다.
부평군 상오정면 내촌에서 거대지주로 살고 있던 수진미삼송(水津彌三松)이 67번지에 밭 555평, 68번지에 대지 71평, 87번지에 임야 5,804평, 89번지에 임야 534평을 소유했다.
인천부에 살고 있던 광천방차랑(廣川房次郞)이 논 90번지에 1,140평, 밭 90번지에 315평을 소유했다.
인천부에 살고 있던 도전태랑(稻田太郞)이 106번지에 임야 6,538평, 186번지에 논 142평, 187번지에 임야 5,360평, 193번지에 밭 806평을 소유했다.
경성에 살고 있던 곡구소차랑(谷口小次郞)이 107번지에 밭 987평, 108번지에 논 1,262평, 109번지에 밭 1,050평, 110번지에 대지 372평, 117번지에 밭 5,253평, 118번지에 밭 1,920평. 191번지에 밭 1,476평을 소유했다. 밭이 10,686평으로 거대하게 소유했다.
인천부에 살고 있던 아길인지조(阿郆寅之助)가 173번지에 밭 724평을 소유했다.
부평군 석천면 심곡리인 깊은구지에 정착해 살고 있던 적우근학길(赤羽根鶴吉)이 181번지에 밭 192평, 196번지에 밭 1,132평을 소유했다.
인천부에 살고 있던 전중좌칠랑(田中佐七郞)이 188번지에 임야 3,523평, 190번지에 밭 661평을 소유했다.
시흥군에 살고 있던 양천인길(陽川寅吉)이 200번지에 밭 3,226평을 소유했다.
부평군 석천면 소사리에 살고 있던 굴전일조(堀田日兆)가 201번지에 밭 1,916평을 소유했다.
조마루 전체에 밭은 81,360평에 109필지였고, 논은 90,939평에 74필지였다. 대지는 10,014평에 25필지였고, 임야는 37,627평에 12필지였다. 여기에 분묘지는 4,906평에 3필지였다.
일본인들이 밭은 20,510평, 논은 4,556평, 대지는 443평, 임야는 21,759평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일제가 강제적으로 조선을 합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조마루에는 일제 부재지주들이 자금력을 총동원해 논과 밭, 임야를 마구잡이로 사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루어져 결국엔 일제의 부재지주가 조마루 지역뿐만 아니라 부천 전역에서 거대하게 땅을 소유하게 되고, 조마루 사람들은 소작인들로 전락해가는 처절한 고통이 드러나 있다.

당시 조마루에는 강씨, 송씨, 이씨, 임씨, 차씨, 홍씨가 살았다. 그 중에서 이씨가 제일 많았다. 어쩌면 이씨 집성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해방 후에는 조마루에 75가구 정도가 살았다. 청주한씨, 전주이씨, 창녕조씨, 은진송씨, 원주 원씨 등 많은 성씨들이 섞여 살았다. 청주한씨 하고 원주 원씨가 새로 합류했다.
그러기에 조마루가 조씨 집성촌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은 증명되지 못했다.

● 조마루는 한자로 조종리(朝宗里)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부평군 옥산면 조종리(曹宗里)이다. ‘마을 조, 무리 조(曹)’였다. ‘성 조(曺)’하고는 한자가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조마루를 한자로 표기할 때 이 마을 조로 오랜 세월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조마루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조종리로 표기한 것이다.
1895년 5월 26일 부평군 옥산면 조종리(朝宗里)로 개칭하였다. 아침 조(朝)는 이때 처음 쓰였다. 이후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도 아침 조(朝)로 썼다. 1973년 7월 1일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행정동이 원미춘의동으로 바뀌었다. 1975년도에는 중앙동이라고 터무니없게 이름을 붙였다. 부천시청이 있는 동이라고 해서 중앙을 붙인 것이다. 참으로 몰상식한 지명 창작이었다. 이렇게 공무원들이 땅이름을 변형시키거나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부르는 습성 탓에 부천시 땅이름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1982년 9월 1일에서는 원미동으로 개칭했다. 그 뒤 원미1,2동으로 분동되었다.

조마루를 어원적으로 풀이하면 뒤의 마루는 산이라는 뜻의 이 어원이다. 보통 ‘으뜸, 꼭대기, 높은 것’을 의미한다. 보통 한자로는 마루 종(宗)을 선택해서 쓴다. 원종의 멧마루와 그 의미가 같다.
멀미인 원미산하고 그 뜻이 같다. 원미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어서 그 뜻을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앞글자 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그 하나는 조마루에서 벼과의 조를 많이 심어 조마루라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땅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조마루가 다른 곳에 비해 논이 없고 밭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더라도 다른 곳에 비해 조마루에서 조를 많이 심어 마을 땅이름으로 삼았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 조가 땅이름으로 되었더라면 한자로 표기할 때 ‘조 속(粟)’으로 써야 했을 것이다.
조마루의 토지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밭은 109필지, 논은 74필지, 집터인 대지는 25필지, 임야는 12필지, 분묘지는 3필지이다. 이렇게 밭이 제일 많은 구성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다고 해도 조가 땅이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두 번째는 부천역사재단에서 출간한 부천사연구에서는 조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조마루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을 조(曺)가 언제부터 아침 조(朝)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풀이가 대세가 되어 조마루엔 조씨 집성촌이라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지어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종리(朝宗里)의 조는 성씨 조가 아니다 조씨들의 집성촌이라면 조촌(趙村)이나 조촌(曺村)이 되어야 한다. 이 성씨 조(曺)를 마을 조(曹), 아침 조(朝)로 옮길 정도로 엉터리는 아니었다.
전국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가 있다. 여기에서 조는 조상 조(祖)이다. 이렇게 조라는 것을 마을 조(曹), 아침 조(朝), 조상 조(祖)로 쓰는 것은 그 어원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960년대 성주산에서 바라본 조마루 , 부천북초등학교 전경 등이 보인다 

● 아침 조(朝)로 쓰면 ‘아침 마루’
조마루는 한자로 표기할 때 조선 지지 자료에는 조종리(朝宗里)로 표기해놓아 아침 조(朝)를 쓰고 있다. 아침 조(朝)는 그 어원이 아사에서 나온 것이다. 고대에서는 아사로 썼고, 중세에서는 아차로 바뀌었다. 아
   
/1998년 원미구청 개청식
침을 아이라고 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에 오면서 아침으로 쓰이게 되었다. 아침이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크다’의 의미인 왕(王), 대(大), 모(母)로도 쓰였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阿斯達)의 아사가 바로 아침 조(朝)이다. 그래서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조종리(朝宗里)가 해뜨는 언덕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크다’의 의미로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조마루는 큰마을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러므로 조종리(朝宗里)의 순우리말 이름은 아사로 표기하면 된다.
하지만 두 가지로 조를 썼다는 사실에서 이 해석은 조금 과장이 섞여 있다. 또한 아사가 아침의 뜻으로 쓰였다고 하지만 여러 한국문헌기록에는 뚜렷한 기록은 없다. 아사, 아차, 아침을 연결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 조는 순우리말로 ‘좁다’는 의미
한가지 해석은 ‘작다’는 의미의 ‘조’를 음차한 것이다.
우리 말에 작다는 의미로 ‘삼 껍질이 부스러진 오라기인 조라기, 작은 종자의 말인 조랑말, 작은 밤톨만한 호리병인 조롱, 호리병박인 조롱박, 감은 끈을 단단히 죄는 뜨인 조르다, 사진기에서 빛살 구멍을 작게 줄이는 장치인 조리개, 아주 작은 아이인 조무래기, 아주 작은 손인 조막손 등이 있다.
한자로 아침 조(朝)를 쓰면서 좁다는 의미로 쓴 땅이름이 있다. 조양(朝陽). 아침 해가 아주 적게 비치는 곳을 가리킨다.
조은골이 있다. 원래는 좁은 골짜기라는 뜻의 좁골에서 출발한다. 좁골이 좁은골로 바뀌고 조븐골, 조은골로 바뀌었다. 이 조은골이 또다시 조응골로 바뀌었다. 이를 한자로 쓰면서는 조은곡(鳥隱谷)이라고 해서 ‘새가 숨기 좋은 골짜기’가 되었다. 이 조은골이 발음 상 좋은골과 같게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는 ‘좋은 골짜기’라는 뜻인 호곡(好谷)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마을 조(曹), 아침 조(朝)’가 아니라 순우리말인 조라는 뜻이다.
이 조는 ‘좁다, 작다’는 의미의 ‘솔다’가 그 어원이다. 이 솔이 ‘족, 졸, 잔’ 등으로 바뀌었다.
조에서 파생된 말은 족이다. 이 족은 작은박인 족박, 조끼인 족기 등이 있다. 땅이름으로는 족골, 족다리, 족지골, 족실, 족들, 족바지, 족박골 등이 있다. 다들 작다는 말이다.
졸의 의미도 ‘작다’이다. 발육이 되지 않고 주접이 드는 졸들다, 작은 규모로 하는 일을 가리켜 졸때기, 가까운 곳은 잘 보아도 먼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졸보기, 국량이 좁고 겁이 많은 사내를 가리켜 졸장부, 참나무에서 잎이 작고 뾰족한 것을 가리켜 졸참나무 등이 있다.
조에서 파생한 말 중에서 잔이 있다. 작은 골짜기인 잔골, 작은 산인 잔메, 잔뫼, 작은 다리인 잔다리, 작은 버들가지인 잔버들 등이 있다.

그러므로 조마루는 ‘길이 좁은 보릉산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하늘에서 바라본 조마루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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