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중도(中道)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엄격한 도(道)로써 나태·번뇌·노여움·어리석음 등으로 비롯되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려고 하는 모든 걸 버리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참다운 진리란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계를 떠난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의 입장에 속하는 가(假)의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그래서 번뇌의 세계이다. 이를 긍정하고 거짓을 깨달을 때 참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헛된 상태에서 참으로 몰입한 뒤 다시 세속으로 돌아올 때 비로서 중도(中道)의 삶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다른 측면에서 중도(中途)는 어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진행 중인 상황으로 시작과 끝의 중간을 일컫는다. 그래서 중도는 먼저 일의 시작과 끝을 전제하고 구체적인 목표와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완성물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비교하면 그 중간인 중도(中途)는 그 당사자의 판단과 결정에 의거할 것이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2년 마다 행해지는 이 행사는 희비와 곡직의 드라마와 쇼의 장관을 보여준다. 출마자를 향해 선택권을 행사하는 유권자와의 관계에서 중도(中道)와 중도(中途)는 그 누가 주인이고 손님일까. 전자가 출마자의 자세일까, 후자가 유권자의 선택일까. 아니다. 아마 둘 모두의 진실한 태도가 협동과 협력의 역학관계라야 옳다.

금번 선거를 위한 어느 한 출마자의 중도(中道/途)에서의 중단(中斷)을 바라보면 안타깝다. 도단(道斷)이란 무엇인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상태나 일이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 숨겨진 말 못할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유권자의 중도를 실천할 수 있는 참정의 권리와 선택도 중단된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적어도 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그 이상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선택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유권자와의 관계는 절대적이기에 외부적으로는 알리기와 전하기는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는 간택을 위한 치열한 내부 경쟁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단독 출마후보는 꿈같은 선망이고 희망이다. 더구나 선출직은 신분의 수직상승이 노력에 대한 작은 보상이고 커다란 이상 실현의 구체적이고 예비적인 실체가 된다.

중도의 삶은 중도의 중단을 중지해야 볼 수 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뒤에 숨은 아주 짧은 미소는 아닐까. 본시 탐스런 열매는 그늘을 벗 삼고 바람을 배경으로 익어가는 시간과의 땀나는 인내의 종착점은 아닐까. 때문에 인고의 지난한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때로 가혹하기 그지없다.

곡우(穀雨)가 멀지 않다. 곡우의 속신(俗信)은 1년 농사를 위한 볍씨를 위해 가마니에 솔가지를 덮고 부정을 보거나 당한 사람이 볍씨를 보면 그 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고 하는 민간신앙이다. 선거는 4년마다의 민의를 위한 거룩하고 참된 농사다. 우리의 삶은 지난날의 거울이 될 중도를 책임으로 도단 없는 담보를 직시하고 가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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