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맞이하여 광주 항쟁 기념 단체에서 항쟁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의 미국 선교사의 부인을 초청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1971년도에 내가 국회의원 비서를 할 때 지역에 있는 교회 중에서 제일 작은 시장 2층에 있는 아주 가난한 개척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에서 피터슨이라는 선교사를 만났다. 피터슨은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서 1년 간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그 교회로 선교사 실습을 나오고 있었다. 교인이 6~70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라서 교인 중에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내가 아쉬운 대로 그의 통역을 하게 되었다.

미리 원고를 받아서 피터슨의 설교를 통역을 했을 때이었다. 모두 일어서서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피터슨이 긴장을 하더니 나에게 귓속말로 “제 축도가 차에 있습니다."라면서 차 열쇠를 줬다. 축도가 차에 있다니?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줄 몰랐다. 피터슨의 얘기는 찬송가 뒤에 축도를 영어발음으로 써놓고 읽는데 그 찬송가를 차에 두고 왔다는 거였다.

눈치를 채고 강대상을 내려와 교회 앞 길에 세워 놓은 피터슨의 차까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서 찬송가책을 가지고 왔다. 교회가 상가 2층에 있었고 바로 앞 도로에 차가 있었던 터라 다행히 피터슨은 한국어 축도를 할 수 있었다.

하루는 피터슨이 연희동에 있는 선교사촌으로 초대했다. 집을 나오는데 피터슨이 “우리 집에 함부로 오십시오.”라고 해서 ‘아무리 우리가 가난해도 내가 저희 집에 뭐 얻어먹으러 온 줄 아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의 뜻은 ‘아무 때나 오라’는 뜻이었다.

그 후 나는 늦은 나이에 안 갈줄 알고 있었던 군대를 남들은 다 갔다온 다음에 가게 되어국회윈원 비서를 연락이 끊어져 소식을 몰랐었다. 그런데 피터슨이 1989년에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피터슨은 광주로 가서 사역을 하다가 광주 학살 때 헬기에서 사격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미국으로 돌아갔었지만, 증언을 하기 위해서 청문회의 초청을 받아 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건강이 좋지 않은 피터슨이 증언을 마치고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와 뜻 깊은 재회를 하진 못했는데 이번에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부인이 왔다는 보도를 보게 되었다.

맨 왼쪽 비쩍 가물은 지성수(필자), 그 옆은 풍성한 피터슨. - 북한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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