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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기 마을은 의령남씨 집성촌, 계산(鷄山) 아래에 위치해...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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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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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기 마을의 위치
   
새기 경로당
새기라는 마을이 있었다. 쇄기라고도 한다.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 싣는다. 멧마루인 원종마을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계산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새기하고 멧마루 사이에는 새터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자로는 신허리(新墟里)이다. 새롭게 터를 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1919년 지형도를 보면 새터말은 둥그렇게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새터말이라는 말로 미루어 멧마루나 새기 보다는 늦게 마을이 생겼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76년 새기 지도
현재의 지도에 보면 새기 마을을 간단하게 찾을 수는 없다. 다들 빌라나 아파트로 뒤덮여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마을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마을길이다. 구불구불한 마을 옛길이 아스팔트로 덮여 있지만 윤곽은 보여준다.
원종1동 부천프라자 동쪽, 해오름아라트 동쪽 원종로 52번길이다. 소사로 748번길 일대이다. 경인고속도로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현재 원종 9통 280번지에 위치한 부천축협 원종지점에서 출발해서 원종 11통 326번지 나래드림빌, 은산빌라, 원신주택 일대이다.
   
1919년 지형도 - 새기
일제강점기 1919년 지형도를 보면 계산 아래에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을 동쪽으로 고리울에서 성골로 가는 연로(聯路)가 있었다. 이 연로에서 새기 마을로 들어오는 소로길이 있었다.
계산의 능선과 은데미 산줄기 사이에서 형성된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새기는 동북쪽으로 계산을 등지고 동남향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이는 겨울이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막기 위하여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새기에 살던 의령남씨들이 지혜가 발휘되어 마을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새기에 해방된 뒤에는 32채의 집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제법 큰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새기 단독주택

● 의령남씨가 새기 마을에 정착한 역사
새기 마을에 첫발을 디딘 이는 의령남씨의 15세손인 남연(南淵)(1650~1728)이다. 2018년 기준으로 368년 전에 태어났다. 남연은 자가 여원(汝源), 호는 탄유(炭臾)이다. 이 남연은 남두추(南斗樞:1605~1682)의 둘째 아들이다. 무려 78세까지 장수했다.
남연 전의 새기 마을은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새기 마을이 존재했기에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을 한 것이다. 남연이 새기마을에 정착한 나이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남연의 묘갈이 남아 있어 남연의 일대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벼슬살이는 묘갈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여기에선 생략한다.

반면에 첫째인 남징(南澄)(1645~1685) 새기에서 은데미 산 넘고 베르내를 건너면 만나는 여월마을에 정착했다. 남징은 자가 청지(淸之)·여심(汝深)이다. 이곳에서 이른 나이인 40세에 사망했다.
이렇게 이들 형제가 새기마을, 여월마을에 정착하게 된 배경이 있다. 아버지 남두추(南斗樞)는 대대로 경기도 광주(廣州)의 숫골에서 살았다. 현재 성남시 태평동이다. 그런데 이 남두추의 아들 둘이 새기마을, 여월 마을에 정착하였다.
남두추의 부인은 현령(縣令) 이선경(李先卿)의 따님 전의이씨(全義李氏:1602~1627)였다. 이 전의이씨는 자식 1명을 낳고 사망했다.
이에 남두추는 다시 부인을 맞이하였다. 이때 부인으로 온 이는 밀양변씨(密陽卞氏:1611~1656)였다. 강상골이 고향인 밀양변씨 변충원(卞忠元:1567~1627)의 셋째 딸이었다. 34세에 남징을 낳고, 39세에 남연을 낳았다.
이 같은 인연으로 외가와 가까운 곳에 정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연이 새기마을에 정착한 인연 풀이를 해 본다.
남두추의 아버지는 남이흥, 남이흥의 아버지는 남유(南瑜)이다. 남유(南瑜, ?~1598)는 1597년에 나무목사에 부임했다. 나주목사 겸 좌영장을 지냈다.
이때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 참여했다. 충무공 이순신과 더불어 왜군을 섬멸하는 공훈을 세우고 왜군이 쏜 조총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남이흥의 나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 당시 부친인 남유는 부평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남이흥을 비롯한 가족들은 본가인 서울을 떠나 부평에 머물렀다.
부친인 남유가 나주목사로 부임해서 왜적들과 교전을 하는 사이, 남이흥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집안 물건들을 챙겨 다시 부평으로 향했다. 일종의 피난 생활이었다. 부평으로 오는 도중에 피난민과 함께 도적떼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남이흥이 대범하게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도적떼를 호통 쳐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남이흥이 부평과의 인연으로 남연의 아버지이자 남이흥의 아들인 남두추가 밀양변씨와 두 번째 혼인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 남연의 묘갈 풀이

증승지 행위수 남공 묘갈명

유명조선국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행어모장군세자익위사위수탄수
남공묘갈명 : 서문을 아울러 쓰다.
족손 보국숭록대부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지경연사홍문관제학세손우빈객 태제는 글을 짓고, 가의대부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총관 조윤형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쓰다.
탄수 남공의 이름은 연이고, 자는 여원이며, 의령의 세가이다.
종묘서령 두추의 아들이고, 의춘군 충장공 이흥의 손자이며, 나주목사 증좌의정 의천부원군 유의 증손자이다. 2대가 모두 순절함으로써 정려되었다.
서령이 승지에 추증된 이길의 양자가 되었는데, 병절교위 정지와 부사직 응정이 양자로 간 집의 증조, 고조이며, 밀양현령 변충원이 외조부이다.
효종 경인년 8월 4일에 출생하여 무신년 8월 22일에 작고하였다.
정사년에 진사가 되었고, 계유년에 사직서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사옹원봉사, 군자직장, 와서별제, 사헌부감찰로 승진되었다. 무인년에 외직으로 나가 양성현감이 되었으나, 얼마 못되어 관직이 바뀌었다. 경인년에 해안을 경비할 일이 생기자, 여러 신하들이 공을 흥덕현감으로 천거하였다. 갑진년에는 세제궁수보위수로 선발되었으니, 이것이 공이 지내온 벼슬이다.
부평 호계 축향의 언덕이 바로 공의 묘소이다.
부인은 음랑 형의 따님이고, 계배는 사인 매의 따님이다. 모두 광주 일탄곡 일옹정에 있는데, 모두 임좌이며, 두 분 다 허씨로 양천의 명망이 높은 집안이다.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여 족질 계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다. 측실의 아들은 종이고, 딸은 이여신과 조수공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계는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익조, 익호, 익상은 현재 수사이고, 익유, 익우는 현재 정랑이며, 세 딸은 서명기, 조윤익, 진사 홍석해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의 딸은 유매, 한법에게 출가하였다. 종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가선대부 익복과 현재 현감인 익록, 익초와 익조이고, 유응휘는 그의 사위이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서령공이 매우 좋아하여 말하기를
“남의 자식 백 명인들 부럽지 않다”
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니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옛 예서를 모아 3편의 책을 만들어 그 글대로 실천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일곱 살 나이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너무 어려서 예제를 따르지 못하였고, 나이 33세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되었으나 가난하여 능히 봉양하지 못했었다. 이제 내가 효도를 해야 할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다만 제사와 묘도를 꾸미는 일을 할 뿐이다”하였다.
제사지낼 때에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으며, 삼가고 깨끗이 하며, 재계하고 제사 전에 홀로 잠을 자는 것을 반드시 한 달 동안 하였다.
문득 병이 나서 역책하는 달에 이르러서도 선기를 만난 것이 앞뒤로 모두 20일이었는데, 맛난 음식을 물리쳤으므로 좌우의 측근들이 감히 강요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재목을 모으고 돌을 마련할 때에 먼저 원대인 양자간 5대조로부터 조부에 이르기까지는 묘소에 묘표가 있고, 부친은 묘갈이 있으며, 증조로부터 부친까지는 상주가 있고, 조부와 부친은 또한 지문이 있다. 전비 이씨는 묘소가 다르다. 부친의 묘소와 본생 고조로부터 조부까지는 묘갈이 있고, 고조는 또한 묘표가 있으며, 조부는 또한 신도비가 있고, 외씨는 3대에 걸쳐 묘지가 있으며, 조비는 또한 묘표가 있고, 그 나머지로는 묘전과 제기를 준비하였고, 또 남은 것으로는 사람의 숫자와 가산에 맞추어 문서를 수정하여 종질에게 붙였으며, 또 나머지로는 스승인 이처사의 묘표를 세웠으니, 아! 위대하도다.
해미에 사는 사람이 공의 농장을 지키는 종에게 곡식을 빌려간 자가 있었는데, 가을이 되어 이자를 계산하여 종에게 갚으려 하자, 종이 놀라며 사양하기를
“어찌하여 이를 가지고 공에게 걱정을 끼치려하십니까”
라고 하였으니, 공의 청렴함은 노복들에게도 알려졌다.
재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구차함이 없이 한 마리 말을 팔아서 비로소 힘들이지 않고 누거만을 마련하여 작고한 뒤에 묘비의 일을 하도록 하였다.
그 재주는 세상에 쓰여질만 하였으나, 집안에서 멈췄으므로 사대부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젊었을 때에 백씨와 함께 진사시에 응시했었는데, 공이 홀로 응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조금 양보하여 형에게 먼저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고는, 끝까지 함께하지 아니하였다.
서령공이 작고한 뒤에 백씨 섬기기를 그와 같이 하였으며, 백씨가 작고한 뒤에는 형수 섬기기를 그와 같이 하여 아침저녁으로 문밖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을 30년동안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나이 18세에 충장공의 일에 비분하여 그치지 않았던 것을 그리워하여 흰 의관을 만들어 입고 필마로 800리를 달려가 안주에 도착하여 유황에 서서 3일 동안 올라가 곡을 하였으므로 사녀들이 모여들어 서로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뒤에 공이 유적을 찬술하여 충민사 아래에 비를 세웠으므로 서인들이 칭찬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결백하였으며, 묻혀졌던 옥사를 명쾌하게 밝혔으므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송사하는 자들이 많이 찾아와 일을 묻고 바로잡았다.
흥덕에 있을 때에 이웃 군의 선비 중에 사노가 그 처를 살해한 자가 있었는데, 10년을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다가 비로소 시신을 묻은 곳을 찾았으나, 너무 오래되어 분별할 수가 없었는데, 공이 사건의 진상을 살펴 죄를 밝혀내기를 마치 신처럼 이미 다 알고 있는 듯이 하였다.
종을 법대로 처리하도록 하고, 다시 선비의 처에게 정려를 받게 하였으므로 남인들이 칭찬하였다.
공은 체구는 크고 용모는 말랐으며, 수염과 눈썹이 빼어나고 아름다워 일광이 빛나는 듯하였다. 한가로이 거처할 적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무릎 꿇고 의연하게 앉아서 일이 닥치면 응하기를 화평하고 평탄하게 하였다.
벽 위에 치각즉저치애즉존과 궁자후박책인과 불기불구 등 몇 구절을 써 붙여 놓았으며, 소학 책을 매우 좋아하여 늙어서까지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내가 본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조부는 충성으로, 손자는 효로서 이것만으로도 영원토록 빛날만하다. 처음에는 손자로 인해 추영되어 승지에 증직되었고, 뒤에는 공의 효행으로서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또한 정려되었다.
원배 허씨를 인릉 정묘년에 이장하여 부좌하였다.
현손 명렬이 삼가 기록하고, 안진경 글씨를 집자하였다.
숭정 갑신 후 네 번째 정미년 월 일에 세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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