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적 지배 방식은 늘 못 가지고 덜 가진 사람들끼리 싸우게 만든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편의점 점주와 소상공인연합회의 저항과 항의는 자신들의 이익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유통구조를 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는 덜 가진 사람들에게 갈 몫을 향한다. 의지와 무관하게...

이렇듯 지금의 시장은 생산자와 소비자와 상인이 서로의 처지를 고려하고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모든 거래는 원천징수되는 세금처럼 유통을 장악한 대기업이 가격을 통제하고 거래를 통한 이윤의 대부분을 미리 취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있지만 이들의 독점적인 가격결정을 저지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인상은 좀 덜 가진 대기업에 종속된 점주나 하청업체들과 더 못 가진 노동자들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경제부총리라는 공직자도 최저임금 탓을 하며 그 싸움을 부추긴다. 최저임금위원회의 역할이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할 수가 없다. 탈출구가 없는 협상이고 절대로 서로 좋을 수 없는 타협이다. 경제정책이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경제가 사회결속을 해치고 있다.

모든 문제는 ‘공정한 가격’에 있다. 생산이든 판매든 그 모든 노동의 가격이 일방적으로 한 이해당사자인 유통업자들이 정하기 때문에 시장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경제의 선구자인 로버트 오언이 노동쿠폰(Labour-notes)를 고안한 것도 이 때문이고, 그를 따르는 노동자들이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들’을 설립하여 식료품 가게를 연 까닭도 그러하다. 공정한 가격없이 어찌 공정한 거래가 가능하며,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 시장은 노동정책과 분배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이다. 노동정책이든 복지정책이든 가장 강력한 세력들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 시스템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최저임금위원회의 협상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그 위원회의 밖, 시장을 장악하여 독점적 가격 결정권을 행사하는 대기업과 다국적기업의 권한을 통제할 때 가능하다. 진정한 경제정책은 선심성 구호가 아니라 덜 가지고 못 가진 이들에게 이익을 분배할 결정의 ‘권한’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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