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개는 나루터인가?
멧마루(원종2동)에 거칠개가 있다. 발음이 조금 거칠다. 이 거칠개라는 땅이름이 있는 관계로 원종2동에선 해마다 거칠개주민대축제를 연다.  대명초등학교 교정에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럼 이 거칠개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칠개의 의미를 단순하게 아주 거친 땅이라고 표현하면 한자로 황현(荒峴)이면 된다. 그러면 뒤에 붙은 개는 의미가 없어진다. 황현(荒峴)은 거칠고개이다.  
이 거칠고개는 것친고개로 표기한다. 부천에서 두 군데에 있다. 일제에 의해 작성되어 1911년도에 출간한 우리나라 땅이름을 총망라한 조선지지자료에 실려 있다. 그 한 군데는 부평군 상오정면 도당리에 위치해 있다. 다른 한 군데는 부평군 하오정면 여월리에 위치해 있다.
도당 마을과 여월 마을에 있는 두 개의 거칠고개가 같을 수는 없다. 도당 마을에서 대추마루를 넘어 멧마루로 가는 길이 거칠고개이다.  여월에서 점말를 거치고 성골을 거친 능미를 넘는 고갯길이 거칠고개이다. 이 거칠고개는 능미에서 서로 만난다. 그러므로 출발은 다를 지언정 능미에서 서로 만나는 관계로 하나의 고갯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음을 알 수 있다.

▲ 1919년도 지형도, 거칠개가 있는 지역

일제강점기 1918년도에 측정하고 그 해에 제판을 했지만 다음 해인 1919년도 3월 30일 발행한 지형도에 따르면 거칠고개가 능미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능미 일대가 거친 지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능미는 일명 돌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한자로는 능미(陵尾)로 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능’은 ‘늘어지다’에서 온 말이다. 부천에서 능안골, 능골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왕릉 같은 능이 있는 산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미는 성골에서부터 시작해서 오정마을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낮은 산이다. 뒤에 오는 ‘미’는 멀미(원미산), 소개미, 상살미 같이 산을 나타내는 우리말이다. 현재도 능미 능선은 아파트로 도배되어 있지만 깎아지를 절벽처럼 도로가 가파르다.

● 포구나 나루터라는 뜻인 ‘개 포(浦)’
거칠개는 한자로 황현포(荒峴浦)이다. 앞의 거칠은 ‘거칠고개’에서 온 말이다. 이는 ‘겹쳐있다’는 표현이 아니라 ‘거츨다(황,荒)에서 온 말이다. 부천향토사학자인 한도훈이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 부천시사에서 ’겹쳐 있는 고개‘라고 해석을 했다. 이는 잘못으로 이번 참에 바로 잡는다.
거칠개에서 개는 베르내를 건널 때 쓰는 조그만 나루터를 가리킨다. 보통 뒤에 쓰는 ‘개’는 포구를 나타낼 때 쓰는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포(浦), 진(津). 도(渡)를 쓴다. 부천에선 굴포천의 한다리개, 굴포천의 꽂개, 베르내의 사루개, 붕어내의 고라개 등이 있다. 다 나루터를 지칭하는 말이다. 
순우리말인 ‘개’로 쓴 나루터는 셀 수 없이 많다. 주로 서해조수가 밀려드는 곳에서 주로 쓴다.
가는개는 한자로 세포(細浦)라 하는데 산 아래에 있는 포구를 가리킨다. 개고지, 개곶은 한자로 개화(開花)로 쓰는데 지형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있는 포구를 가리킨다. 갯마을, 개머리는 포구마을이라는 뜻이다. 부천 약대에 있는 곶개, 꽂개는 한자로 화개(花浦)로 쓰는데 산자락이나 바다쪽으로 튀어나온 곳에 있는 포구이다.
고분개, 굽은개는 한자로 고부포(古阜浦)로 쓰는데 지형이 구부러진 곳에 있는 포구를 가리킨다. 나진개, 낮은개는 한자로 나진포(羅津浦)나 그저 나진(羅陳)으로 쓰는데 산밑 낮은 곳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킨다. 달개, 다리개는 한자로 월포(月浦)로 쓰는데 산 아래에 있는 포구를 지칭한다. 달은 산의 옛말이다.
댓개는 한자로 죽포(竹浦)로 쓰는데 산 밑의 포구를 지칭한다. ‘ᄃᆞᆮ’이 산의 옛말이다. ᄃᆞᆮ개가 댓개로 변하고 대개로 변한 것이다. 이를 대에 주목하고 대나무로 착각해서 대 죽(竹)을 쓴 것이다. 대나무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땅이름이다.
독개, 돋개, 돌개, 도삿개, 석개는 한자로 석포(石浦), 도포(都浦)로 쓴다. 이는 ‘돈다’는 의미로 휘돌아가는 산마루 아래에 있는 포구를 가리킨다. 아예 돌개, 돌케, 돌깨로 쓰기도 한다. 이를 한자로 회포(回浦)로 쓴다.
말개, 몰개는 한자로 마포(馬浦), 두포(斗浦)로 쓰는데 높은 산이 있는 곳에 있는 포구를 가리킨다. ‘말, 몰’이 ‘높다, 으뜸이다’는 뜻을 갖는다. 서울의 마포가 그 뜻에 부합한다. 모래개, 몰개도 같은 뜻이다. 이를 한자로 쓰면 모래가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사포(沙浦)가 된다.
사잇개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포구를 가리키는데 한자로 초호(草湖)로 쓴다. 새를 억새풀로 보고 한자로 옮긴 것이다. 초포(草浦)로 쓰다가 어느 때인가 초호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수랑개는 뻘이 많이 질척거리는 곳에 있는 포구를 가리킨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는 주포(酒浦)로 바뀌어 버린 곳이 있다. 수랑개가 수란개로 바뀌고 술안개로 발음하다가 술난개로 최종 바뀌어서 술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술을 많이 먹는 포구’라는 그럴싸한 해석이 덧붙여지게 된다.

● 포구의 다른 이름들   
고려시대에 예성강변엔 벽란도(碧瀾渡)라는 포구가 있었다. 압록강변엔 압록도(鴨綠渡)가 있고, 한강변엔 사평도(沙平渡)하고 양화도(楊花渡)가 있었다. 이렇게 건널 도(渡)도 포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한강변을 중심으로 한강도(漢江渡)가 있고, 삼전도(三田渡)가 있었다.
그 다음 진(津)으로 표기된 한강 변의 포구는 노량진(鷺梁津)이 있고,  흑석진(黑石津)이 있었다. 그 아래에 양화진(楊花津), 공암진(孔巖津)과 광진(廣津) 등의 많은 나루터가 있었다.
이는 시대에 따라 군사적인 요충지, 일반 배들이 들락거리는 나루터 등으로 세분화 되었다.
 
● 거칠개의 위치
 

▲ 거칠개 나루터가 있었던 곳인 베르내

거칠개가 조그만 나루터이라면 당연히 베르내 줄기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거칠고개를 건너 멧마루로 갈 때 베르내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생긴 땅이름이다. 반대로 멧마루에서 거칠고개를 거쳐 오정마을이나 도당마을, 여월 마을로 가야하는 곳에 있는 나루터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도에 발행한 지형도에서 거칠개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최현수 소장이 출간한 부천사연구 1집에는 거칠개의 위치를 오정동 143-4, 147-5번지 일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오정동 143-4는 상오정로하고 성오로 127번지가 갈라지는 곳이다. 명문교회 위편이다. 오정동 147-5번지는 오정어울마당 남쪽 언덕을 가리킨다. 착한낙지 서쪽이다. 이는 거칠개가 단지 거친 땅이라는 걸로 이해를 해서 능미 산자락 이곳저곳을 지칭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위치가 애초부터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로 합쳐서 거칠고개라고 표기하면 될 것을 거칠개라고 달리 표현한 것에 모순이 있다. 그러므로 명백하게 거칠개는 조그만 나루터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칠개는 거칠고개 아래에 있는 나루터라는 의미이다. 나루터가 당연히 하천을 건너는데 사용하는 것이기에 길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멧마루에서 오정 마을로 가는 길이 가장 적합하다.
멧마루에서 도당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이는 수돗길로 방우리번덩 지역에 둑이 쌓여져 있고 베르내엔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이는 수돗길을 만들면서 베르내를 가로질러야 했기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을 거칠개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아래 멧마루에서 해발 21미터가 넘는 덕산을 넘어 오정 마을로 가는 연로(聯路)가 있다. 당연히 베르내를 건너야 한다. 이 길은 수돗길이 생기기 전부터 있는 길이어서 당연히 나루터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루터가 아니라 흙다리나 나무다리를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표기가 없는 걸로 보아서 나루터가 있는 걸로 보아야 한다.
현재 그 위치는 오정레포츠센터, 자전거박물관 앞 도로이다. 베르내가 복개되어 있는 지역이다. 상오정로 184번길, 상오정로 182번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동문 5차 아파트 앞이다. 부천대명초등학교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다. ‘거칠개 나루터’로 보인다.
현재는 서해조수가 들락거리지 않고 베르내도 다른 쪽으로 바뀌어서 많은 물이 흐르지 않아 그 폭이 아주 작다. 하지만 예전에는 서해조수가 밀려오고 해서 그 폭이 제법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 거칠개가 나루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칠개가 나루터가 되려면 베르내의 수량이 많아야 한다. 현재의 베르내는 부천산울림청소년수련관에서 흘려보내는 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당연히 베르내하고 연결된 굴포천이 한강 하구로 열려 있었다. 김포 신곡리에 있는 양배수장 댐이 없어서 한강물이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이에 간만의 차가 최고 10m이상이 되는 서해 조수가 한강을 역류해서 물밀 듯이 굴포천으로 들어왔다. 서해조수는 당연히 굴포천을 역류하고, 베르내를 역류해서 거칠개를 단숨에 돌파했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역류는 일어났다.
물이 빠졌을 때는 멧마루에서 오정 마을로 그냥 건널 수 있는 곳이지만 밀물이 밀어닥치면 어림없는 소리가 되었다. 이에 베르내를 건너려면 비록 그 거리가 매우 짧지만 배를 타고 건너거나 먼 곳을 돌아가서 건너야 했을 것이다. 먼 곳을 돌아가기는 싫고 당연히 나룻배를 부르거나 매여있는 나룻배를 끌어다 타고 건넜을 것이다.
조선시대 말에 설치된 한다리, 대교가 있는 곳에 있는 포구인 한다리개엔 수시로 배들이 들락거렸고, 삼정의 압구지, 산우물 마을, 부평의 삼산동에도 배들이 들락거렸다는 증언이 있다. 이로 미루어 부천 곳곳에서 배로 물산(物産)들을 실어 날랐음을 알 수 있다. 거칠개, 사루개에서도 배를 띄웠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거칠개 나루터로 추정되는 곳은 해발 8.5m 정도이다. 베르내 물줄기가 흐르는 바닥은 그 보다 한참 낮아서 서해조수가 수시로 들락거리기에 적당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서해조수를 빼 놓고는 부천의 땅이름을 해석하기가 참으로 곤란한 곳이 많다. 서해조수가 한강을 역류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거침이 없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