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민은 드러머(Drummer)다.

 

그렇다고 프로드러머는 아니다. 취미드럼동호회인 부천렛츠드럼을 운영하는 운영자다. 드럼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드럼을 가르치고, 드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드럼을 치면서 논다. 윤혜민은 나에게 드럼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 인연도 어느새 8년이다.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100호 특집에 이 사람 인터뷰를 해보자는 편집위원의 제안에 갸우뚱했다. 내 기억에 몇 차례 인터뷰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나와는 나름 가까이 지내는 분이라 뭐 특별한 게 있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꼭 뭐가 특별해야 하나? 콩나물신문인데..  만나기로 한 날 오전에 비보를 접했다. 진보정당 원내대표의 자살. 정의당의 당원으로 알고 있는데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을 것이고 인터뷰가 가능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눈을 가진 윤혜민 조합원은 조금 전까지도 울고 있었는지 불긋불긋 부어있다. 그래도 앉혀 놓고 이런저런 썰을 풀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이고~ 어색하여라.)

제 살 깎아 콩나물 물주기까지..

 

그녀는 신촌과 구리의 렛츠드럼동호회를 운영하다 동호회 운영을 원하시는 믿을 만한 분들에게 맡기고 10년 전 아무 연고도 없는 부천에 혼자 입성했다. 타고난 성실함과 밝은 성격으로 많은 회원들과 드럼을 치며 행복을 느꼈지만, 때로는 회원들 사이에서 좌충우돌 갈등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그 무엇인가에 갈증도 느꼈다고 한다. 여기저기를 기웃기웃 그 갈증을 해소해 줄 곳을 찾던 중 협동조합을 강의한다는 담쟁이문화원을 찾게 된다. 혼자 수소문하여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대는 당돌한 듣보잡이었다는 첫인상을 말하는 이도 있다.(한효석 담쟁이문화원 원장님 기억).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윤혜민은 콩나물신문을 만드는 발기인을 거쳐 이사, 배포, 대의원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섭렵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콩나물신문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공동체를 배우며 지역사회에 눈을 떴다. 평생 만났던 좋은 사람보다 콩나물신문을 통해 짧은 시간동안 더 많이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점점 충실한 콩나물 전도사가 되어간다. 급기야 드럼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콩나물교를 전파하며 콩나물조합원에 가입하는 드럼 회원들에게 동호회비를 깎아주었다. 일명 ‘제 살 깍아 콩나물 물주기’.
덕분에 드럼을 배우러 온 나도 콩나물신문조합원이 되었고, 회비할인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얼마 안되는 조합비지만 매달 돈은 나가는데,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궁금해 나 역시 열린 편집회의 안내문자 하나보고 콩나물신문사를 찾아 갔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첫 편집회의에서 편집팀장을 맡게 되는 이상한 곳이었다.

신문발행일에 맞춰 휴일을 정했다

콩나물신문 지령 100호가 발행되는 소회를 묻는 질문에 윤혜민 조합원은 말한다.
“언론이 뭐고 신문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하나하나 신문이 만들어져 가는 기쁨도 느끼고 열심히 하다 보니 이사직도 맡게 되고 조합원도 많이 늘어났어.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이기도 하지. 그냥 동네이야기, 사람이야기 소소하게 담아보자며 시작되었는데 점점 눈높이도 높아지고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신문다운 신문이 나와야 한다는 내/외부의 이야기도 들리면서 조금씩 부담도 생기고 겁도 났던 거 같아. 그래서 신문 만드는 일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들께 자릴 내어드리고 이사직도 물러나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배포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 거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윤혜민 조합원은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차에 한가득 신문을 싣고 나선다. 동호회 운영중 쉬는 날을 일부러 신문 나오는 날로 맞출 정도이니 말 다했다.

재미있게 즐기는 사람을 당할 자는 없다.

그녀는 한 번 꽂힌 일에는 온갖 열정을 쏟는다.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다니는데, 성적이 all A라며 심심치 않게 페북에 자랑질을 한다.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우는 이유는 이렇단다.
“소통하고 연대하고 싶었던 거 같아. 그러려면 알아야겠더라고. 인문학을 포함한 역사, 철학, 교양, 대중문화. 그리고 내가 지금 동호회를 통해 운영하고 있는 생활예술에 이르기까지. 이런 다양한 공부들이 짧지만 내가 속한 모임과 시민단체 활동들을 하며j 생겼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더라고. 그러니 재미가 있을 수밖에... 뭐든지 재미있게 즐기는 사람한테는 당할 자가 없잖아. 벌써 다음 학기에는 어떤 수업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지니 말야. 먼 얘기이긴 하지만 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까 막연하게 그려 보는 건, 4학년까지 잘 마무리하고 좀 더 연구적인 과정으로 대학원에서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 아니 굳이 대학원을 가지 않더라도 생활문화예술 혹은 문화다양성이라는 건 세계적인 흐름이야. 우리나라 정부에서도 여러 지원책과 예산을 투자하고 있는 만큼 내 주변사람들과 효율적으로 접목해서 잘 만들어 내보고 싶은 바램이 있어”
엄청난 열정이다. 그런 열정 때문일까.. 그녀의 주변에는 좋아하는 사람, 응원하는 사람, 돕는 사람들이 참 많다. 사람을 겉으로 평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답게 겉보단 내면이 매력적인 사람이다. ㅎㅎㅎ

기존 언론사와 똑같을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일부 정치인들은 콩나물신문을 참 싫어하는 것 같다는 푸념을 섞어 콩나물 신문이 지역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난 처음 콩나물신문협동조합에 참여하면서 부터 꾸준히 가지고 있는 신조가 있어. 우린 모두 아마추어니 꼭 잘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즐기면서 함께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잘하고 있다 못하고 있다는 중요하지 않아. 기존 언론사와 같은 똑같은 역할을 우리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이 콩나물신문을 불편해 한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 우리 언론중재위원회도 다녀오고 소송도 당해 봤잖아. 뭐 잘못하는 거 있으면 정정보도도 내고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가는 거지. 물론 관에서 주는 행정광고 따위는 못 따먹겠지만 대신 자유롭게 할 말 다 하잖아. 하하호호“ (저 나이에 저렇게 해맑기도 어렵다) -.-;

“아쉽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또 인정해야지. 그런데 난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 중앙정치의 구도가 그대로 지역정치에도 반영되는 선거였지만 시민들이 점점 깨어나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밝다고 생각해. 정권을 바꾼 시민이잖아. 앞으로는 중앙정치와 지방자치는 별개로 내 삶의 터전이 되는 곳은 다른 시각으로 정치인들을 바라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생전 처음 무소속 시장후보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소감을 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서로 지켜봐주고 토닥여주고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보통 이런 축하 인터뷰의 말미에 하는 식상한 질문을 어김없이 또 해보았다. 콩나물신문이 200호 300호 1,000호까지 지속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유분방한 교육을 받고 사고하는 유럽 사람들도 몇 백 년에 걸쳐 협동조합을 고민하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는데,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우리나라는 너무 조급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 똑똑하다는 정치인들도 협치를 못해서 저렇게 난리들인데.. 우리도 좀 실수할 수 있고, 다시 협의하고, 조정하고 안 되면 다시 돌아가더라도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콩나물신문이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신문이라고들 많이 얘기하잖아.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힘들더라도 등 돌리지 말고 쉽게 떠나려 하지 말고, 직접적인 참여는 어렵더라도 서로 지켜봐주고 토닥여주고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콩나물신문은 미디라기보단 매개체다.

콩나물신문은 뉴스를 전하는 미디어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아닌가 싶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 누구나 편집회의에 참가하고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고 지역 구석구석에 사람들의 소식을 퍼 나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윤혜민 조합원과 나는 이런 콩나물신문의 가치를 충분히 공유하고 있다. 100호를 발행하며 내가 인터뷰를 했으니 200호에는 윤혜민 조합원에게 나를 인터뷰하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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