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절정이라는 중복이 지나고 가을의 시작이라는 입추가 기다리고 있다. 폭염과 폭우에도 계절은 가고 온다.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늘 인간이 인간임을 일러주는 거룩한 존재다. 그래서 계절의 순환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바가 절대적이다.

아주 오랜 옛날 자연은 인간에겐 다가갈 수 없는 절대적 신앙이었다. 받들어 모시고 그 표시로 제사를 행하고 인간의 한계를 자연에 대한 믿음으로 결과를 끝없이 인내해야 했다. 때문에 자연과의 소통은 특수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이자 축복이었다. 아직도 살아 변화하는 신화는 소통에 대한 변형이고 변용일 따름이다.

소통(疏通)은 사물이 막힘없이 잘 통하거나, 의견이나 의사 등이 잘 통함을 의미한다. 전자는 외물이거나 외부와의 관계적 측면과 이유가 깊고,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적인 것이 차이점이다. 자연과의 소통에는 믿음의 강약이나 경중과 무관하게 일방적이고 한계가 분명했다.

유사 이래 더위가 그 기록을 하루마다 갈아치우는 복중에 정치인들의 행위가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의견이 어지럽다. 의견이나 의사가 잘 통해야하는 인간과의 소통이 필요한 이유가 있어서 행한 행동들이 논란이 되고 분분한 의견의 도마 위에 올라 열기를 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소통의 이유와 필요가 그 내용과 형식에서 의도된 기획이라면 보다 분명한 의도와 결과를 숙고해야만 한다. 정치는 정당을 근간으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추구하는 이념으로 편이 갈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법으로서의 의도를 분명히 밝혀도 목적하는 결과는 다를 수 있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과 국가 수도의 수장의 행동에는 그 이유를 말해 무엇하랴. 통치자의 행차와 수장의 출도가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였는지, 아니면 어려운 민정에 대한 직찰(直察)이었는지는 다음이다.

알아보고 싶은 민정이 최고 통치자가 직접 눈으로 보아야만 한다면 신하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존재로서의 신하와의 소통의 문제 또한 심각함을 노정시킨 것이 더욱 우려되는 바다. 보아야 믿을 수 있는 정치는 신뢰의 근간이나,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일 때 위험할 뿐이다. 민심은 천심이고 엄중한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었을까? 직접 보고 싶은 것이었고, 직접 보여줘야만 했던 것이 지나친 소통의 문제는 아니었기를 기우(杞憂)라고 상상해본다. 보여주기와 보여지기의 거리는 상반된 관계만큼 멀고 어렵다. 분명한 이유와 근거가 없을 경우는 소통이 더욱 문제가 된다. 서로의 신뢰는 상상이 되고 차이는 불만을 초래하고 불신을 불러온다. 사후 변명과 해명은 의심과 궁색이 두터워질 뿐이다.

입추라는 절기가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버티게 하는 건 자연의 소통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삶의 질곡은 의식주를 넘어 관계의 불통과 불신에 의한 바가 결정적이라는 이론은 이제 구태하다. 이열치열은 오랜 관습으로 깨달은 선조들의 지혜의 결과이고 신뢰와 소통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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