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이발관 윤여철 이발사 이야기

 
담쟁이넝쿨 사이로 간판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백제이발관’
이발소 안은 시간을 고스란히 붙든 듯,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남자손님이 머리털을 깎고 있었다. 서걱서걱 가위질 소리가 정겹다.

백제이발관 윤여철 관장은 29년 동안 소사본3동에서 이발 일을 했다. 15살 때부터 시작해 지금은 60세가 됐으니, 45년 내도록 이 일에 몸 담았다.

“제 고향은 부여예요. 15살 때부터 읍내 이발관에서 도제식으로 배웠어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가서 이발소를 해보지 않겠냐는 지인의 꾐에 넘어가 17살에 영등포로 오게 된 거죠. 도시 물 좀 먹고 싶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과 답답한 시골풍경이 겹쳐졌다. 윤여철씨에게 서울은, 두려움보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차비하고 옷가방만 덜렁 가지고 올라와갔고. 당장 잠자리가 없어가지고, 손님의자를 제끼고 거기서 자고…. 그땐 그렇게 생활했어요.”

윤여철씨는 예전 일을 떠올리며 생활이 넉넉하진 못했지만 고향을 떠난 것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45년을 외길을 고집했지만 윤여철씨에게도 이발 일이 싫증난 때가 있었다. 운전면허증을 따고 화물차를 몰았다. 작은 체구 탓에 짐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1년간의 외도를 접고 이발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영등포에서 심곡동으로 넘어오면서 제 이발관을 갖게 되었죠. 내 돈은 총 300만원 밖에 없었는데 남의 돈 400만원을 빌려 영업을 시작했어요. 옛날 구리모텔 부근인데, 이화목욕탕 옆에서 했죠. 목욕탕 이름 따라 이발관을 지으면 잘된다고 해서 이화이발소라고 이름을 지었죠.”

정말이지 장사가 잘돼 한 달에 300만원에서 많게는 400만원을 벌었다. 종업원도 두고 빚도 갚았다.
“지금은 오던 손님들도 미용실로 다 뺏겼죠. 원인은 이발사들이 다 잘못해서 그래요. 이발소들이 퇴폐업소처럼 하다보니까 아버지는 와도 자식들은 안 보내는 거예요. 그때부터 살살 손님이 줄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몇몇 이발관들은 여성 종업원을 두고 돈을 버는 곳도 있다. 그러나 윤여철씨는 혼자서 일하는 이 가게가 자기 몸에 딱 맞단다.

“예전엔 혜림원 미용봉사도 하고 의경들도 머리카락을 깎아주다가 흐지부지 됐죠. 소사구 이용협회 소속인데 뭔가 보람된 일을 해보자고 한 게 동사무소나 복지회관을 찾아다니며 어르신들 머리카락을 깎아주게 된 거죠.”

미용봉사를 하러 갈 때면 어르신들이 마중 나와 반긴다. 그게 힘이 돼 어느 덧 9년이 되었다.

백제이발관으로 이름을 지은 이유가 궁금했다.
“제가 부여출신이기도 하지만 처음 이발을 배울 때, 손님들 머리를 감기고 청소하며 꼬마노릇 할 때 그곳이 백제이발관이었어요. 부여시내에 가면 아직도 있더라고요. 지금은 주인도 바뀌었겠지만.”

윤여철씨는 간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냈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단골손님 중엔 제 또래도 많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있죠. 여기서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 간 단골이 있는데 여태까지 이곳을 찾으세요. 다른 한 손님은 인천으로 이사 갔는데 일주일에 한 번 여길 찾아요. 머리카락 자를 때도 없는데 꼭 오셔요. 여길 와야지 일상이 돌아가는 것 같대요. 또 다른 손님 중에 몸이 불편한 어르신이 있어요. 그분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을 때 제게 전화를 해요. 그러면 가위 싸들고 집으로 찾아가죠.”

윤여철씨는 백제이발관이 커지길 원치 않았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소박하게 웃는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단골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백제이발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나가길 바라 본다.
▲ 백제이발관 윤여철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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