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마루 성터골 이야기
성터골은 멧마루에 있는 계산(鷄山)의 원종1동에 위치한 골짜기를 말한다. 골짜기이지만 성재(城峴)를 기점(起點)으로 해서 길게 집들이 이어진 마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 성터골을 마을이라고 하지 않은 걸 보면 멧마루, 새기, 새텃말, 은데미 같은 마을에 비해 그 크기가 작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멧마루에서 가까워 통칭 멧마루로 통합해서 부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이 성터골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음은 일제강점기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이 지형도를 보면 오정초등학교에서 오쇠리로 가는 산언덕이 길게  이어진 그 동쪽 아래에 마을 집들이 늘어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성터골 남쪽편엔 수돗길이 지나간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성터골 위쪽에 오정면 사무소가 위치해 있었다. 그때는 멧마루가 오정면 행정의 중심지였다. 성터골 위로는 헐떡고개가 위치해 있다. 현재는 등마루라고 한다.

▲ 원종2리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지붕개량한 모습

정말 이곳에 성터가 있었을까? 은데미에서 시작한 계산 줄기가 이곳을 거쳐 봉안산까지 이어졌다. 그것도 마치 성처럼 일정한 높이로 길게 쌓여진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 빌라 단지로 뒤덮여 있지만...
땅이름으로 성터라는 말을 쓴 곳은 전국에서 그리 많지 않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에 성터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전남 나주시 공산면 화성리에도 성터골 골짜기가 있다. 성터골이라는 말이 좋아서인지 한식집 간판으로 몇 곳이 사용하고 있다. 이 밖에는 성터골이라는 땅이름을 찾기 어렵다.
1993년도에 발간한 최현수의 부천사연구에선 성터골이라는 땅이름하고 성재너머가 같다고 풀이하고 있다. 위치는 멧마루 동쪽 산아래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성재이다. 한자로는 성현(城峴)이다. 이 성현(城峴)은 일제강점기 1911년도에 출간한 조선지지자료에 실려 있다.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 성현. 이 성재가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천사연구 제1집에 붙어 있는 지도에는 성터골은 멧마루 마을 남쪽에 위치해 있고, 성재너머는 동쪽에 위치해 있다. 서로 마주 보며 있는 다른 지형이다.
지도에는 다른 지형으로 표기를 해놓고 설명은 ‘같다’고 설명해 놓고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까? 제대로 된 현장 확인 없이 지도제작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터골과 성재너머는 그 뜻이 같다. 성재너머가 계산의 골짜기이자 마을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고리울내 지류와 합류해서 흘러갔다.

성재에 일제지주가 주인인 숲이 있었다
성재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성재는 멧마루 마을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정초등학교에서 오쇠리인 밖오시로 가는 고개길을 일컫는 걸로 되어 있다. 소사로 862번길이다.
여기에 덧붙여 멧마루에서 성재너머 가는 수돗길인 소사로 794번길도 성재로 인식되고 있다.
원래는 오정초등학교에서 밖오시로 가는 길이 성재인데, 이후 성재너머로 가는 길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1911년도에 출간한 조선지지자료엔 원종리에 단 하나의 고갯길이 있다고 적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개의 고갯길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어떤 것이 원래부터 있던 고갯길인지 하나하나 검증해고자 한다. 
현재는 멧마루 오정초등학교 앞에서 오쇠리로 가는 옛도로는 조금 높은 언덕길에 불과하다. 산등성이로만 연결되어 있다. 고갯길이라고 하면 산 아래에서 출발해서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고갯길이라고 하지 않고 산길이거나 마을 고샅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길들은 다양하게 표기된다. 산길이지만 폭이 좁은 길인 오솔길, 마을 집들 사이에 있는 좁은 고샅길,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가거나 돌아가는 산길, 멧마루 앞에 펼쳐진 방우리번덩 같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들길, 자갈이 온통 깔려 있는 자갈길,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부천 대부분의 길이었던 진창길, 폭이 좁은 소로길, 폭이 큰 한길, 산길이나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 등이 있다.

성재가 있는 계산 전체가 일제로부터 해방전까지 숲이 아주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제 지주가 소유했다. 그래서 일제지주는 산을 관리하는 산감을 두고 감시를 했다. 멧마루 사람들이 이곳 숲에서 몰래 나무를 하거나 하다가 적발되면 오정파출소에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조금 더 악질적으로 처벌한 때에는 부평경찰서까지 끌려가서 나무를 베거나 갈퀴나무를 긁었다는 이유로 갖가지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해방 후에는 멧마루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 숲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내고 갈퀴로 긁어가 순식간에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일제강점기 일제 지주에 대한 원한이 만들어 낸 민둥산이었다.
1912년도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당시 멧마루엔 일본인 부재지주는 2명이었다. 인천부에 살면서 당시 부천시 곳곳에 땅을 소유한 이세덕삼랑(伊勢德三郞)은 밭 3,317평, 잡종지 488평, 대지 513평을 소유했고, 내동에서 거대지주로 살던 수진미삼송(水津彌三松)이 밭 1,190평, 대지 606평을 소유했다. 숲을 가꾼 일제지주는 이 둘 중의 하나로 보인다.  
 
멧마루 성재(城峴)의 정확한 위치
이 성재를 헐떡고개라고 한다. 고개를 오르내릴 때 아주 가팔라 숨을 헐떡거렸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런데 아주 힘겹게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내리는 고갯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다. 성터골에서 멧마루로 올라오는 고갯길도 마찬가지다. 오쇠리로 가는 고갯길은 그 길이가 긴 반면에 성터골에서 올라오는 고갯길은 그 길이가 짧다.

▲ 멧마루에서 오쇠리로 가는 헐떡고개, 등마루

일제강점기 1919년 지형도를 보면 새기 마을에서 시작된 계산의 산언덕이 길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소사로 862번길은 오쇠리로 연결되지 않고 멧마루 마을 안으로 굽어 들어갔다. 이후 오정초등학교에서 밖오시인 오쇠리로 연결된 도로가 크게 확장되어 개설되었다. 현재의 멧마루 마을 앞을 통과하는 소사로는 최근에 들어서야 확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 도로는 그저 연로(聯路)로 마차 정도가 다니는 도로에 불과했다.
대신 소사로 862번길 곁에는 일제강점기에 오정면사무소가 있었고, 오정파출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도로도 크게 확장된 것이다. 
오정초등학교가 설립되기 전이다. 현재 오정초등학교 앞 수돗길에서 멧마루 마을 안으로 연결된 연로(聯路)였다. 이 길은 고갯길이 아니라 평범한 마을길이다. 이 연로는 멧마루 마을 가운데에서 사거리로 만났다. 오정마을로 가는 길, 밖오시로 가는 길, 점말로 가는 길, 수돗길로 가는 길이다. 
이 1919년 지형도 전에는 멧마루 마을길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멧마루에서 오쇠리인 밖오시로 가는 길, 오정마을로 가는 길, 점말 등으로 가는 소로길이 있었을 것이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길이다.
또한 멧마루에서 고리울로 가는 길도 또한 있었을 것이다. 이 길이 멧마루 마을에서 오정초등학교 앞으로 이어진 길, 그리고 수돗길로 연결된 도로였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가야 고리울 마을을 만나기 때문이다. 수도선로(水道線路)로 명명된 수돗길이 만들어진 1910년 전에는 고리울 마을로 가는 소로길이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재의 정확한 위치는 멧마루에서 수돗길을 거쳐 고리울로 가는 고갯길이다. 현재도 제법 가팔라서 오르내릴 때 약간의 헐떡임이 있다.

성재의 의미
성재는 ‘성이 있는 고갯길’이라는 뜻이다.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성재, 성현(城峴)은 성이 있는 곳에 위치한 고갯길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성처럼 생긴 고갯길, 성을 닮은 고갯길’을 의미한다. 이 고갯길은 그리 많지 않다. 
부천 산골마을, 솔안말을 거쳐 인천도호부로 가는 길목에 성현(星峴)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여기에선 ‘별 성(星)’을 쓰고 있다. 우리말로는 비리고개, 비루고개, 별고개로 부르고 있다. 인천남동구장애인복지관에선 비루고개축제까지 열고 있다. 별·베리·베르·벼루·비루·비리·비린·베락·벼락은 낭떠러지나 비탈길을 가리킨다. 
보통 고갯길은 산언덕이기에 조선시대 성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성은 모두가 석성(石城)이기 때문이다. 석성하고 일반 산언덕은 그 형태가 닮았을 뿐이다.
백제의 성은 대부분 토성이다. 흙으로 판축을 해서 쌓아올린 성이기에 산언덕과 비슷하다. 아마도 계산이 성(城)을 닮았다고 하면 백제의 성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고대 삼국시대에는 성(城)에 대한 말은 다르다. 고구려는 성을 가리켜 구루(溝漊)로 불렀다. 또다른 말은 홀(忽)이라고 했다. 수곡성(水谷城)은 매단홀(買旦忽), 음성(陰城)은 잉홀(仍忽)이라고도 했다. 인천은 비류백제의 수도로 미추홀(彌趨忽)이라고 해서 문학산성을 지칭한다.
백제에선 성을 뜻하는 단어는 '기(己)'였다. 결성군(潔城郡)은 본래 백제의 결기군(結己郡)이었다. 신라에선 성을 가리켜 '잣'이라고 했다. 이후 홀(忽)과 기(己)는 사라지고 잣만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잣은 ‘재 현(峴)’으로 고갯길을 지칭하는 말로 변모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땅이름에서 성을 의미하는 ‘잣’은 ‘작․잔․잠․장’ 등으로 발음되는 변모를 겪었다. 이게 한자로 쓰여지면서 ‘작(作), 작(鵲), 배(盃), 잠(岑), 잠(蠶), 장(壯)’ 등으로 표기된 지명이 생겼다.

멧마루 성재는 ‘재 성(城)’으로 전국에 수많은 땅이름이 있다. 고성군, 횡성군, 개성시, 성남시, 안성시, 화성시, 고성군, 의성군, 곡성군, 보성군, 장성군, 홍성권, 음성군, 구성군, 자성군, 창성군, 경성군, 성진시, 온성군, 학성군, 벽성군 등이다. 조선시대 각 도시별로 수많은 성들이 있었고, 산성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멧마루 성재는 삼한시대 목책인지, 백제시대 성인지, 통일신라시대 성인지 모르겠지만 멧마루에 성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예부터 우리나라엔 거의 전 마을마다 목책이며 성이 있었다. 이 사실로 미뤄보면 이렇게 성(城)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남아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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