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멧마루 지역의 들판
멧마루 지역 들판은 일제강점기 1925년 김포 신곡리에 양배수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이 양배수장이 1925년도 을축년 수해에 파괴되었다. 부평수리조합에서 부서진 양배수장을 걷어내고 다시 시공을 해서 완공한 해가 1929년도였다. 이후 부천 전역의 들판에 한강물을 공급해주는 동부간선수로도 완공되었다. 이 동부간선수로에서 뻗어나온 수로가 멧마루까지 연결되어 갈대밭 천지였던 곳이 하나 둘 농지로 바뀌어 나갔다.
일제강점기 1912년도에 출간한 토지조사부에는 멧마루인 원종리의 토지현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밭은 212,648평, 논은 313,129평이었다. 대지는 23,555평이었다. 지소(池沼)는 웅덩이, 둠벙으로 한 필지에 140평에 달했다. 임야(林野)는 5필지에 2,447평이었다. 논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갈대만 무성한 잡종지는 9필지 10,684평에 달했다. 분묘지는 3,126평이고, 수도길이 지나가는 수도용지로는 1,588평이었다. 
멧마루는 계산이 길게 늘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밭 보다는 논이 더 많았다. 그러기에 부천의 다른 지역보다는 논농사로 수확한 쌀이 많아 부촌(富村)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제지주 보다 멧마루 토박이 분들이 땅을 소유하는 비율이 높아 자립자족(自立自足)의 비율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 멧마루에 설치된 보(湺)들
부천 지역의 논농사는 굴포천으로부터 시작했다. 굴포천 지역에는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 때부터 물을 가둬놓는 저수지인 제언(堤堰)들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서해조수가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태풍, 홍수로 인해 이들 제언들이 무너져 자연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자연으로 돌아간 곳은 갈대밭으로 변했다.
장말, 사래이, 넘말, 겉저리 지역은 자연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개별적인 논둑을 막아 농사를 지었다. 논마다 특색이 있어 그에 맞게 이름을 붙인 것은 부천지역 농민들의 투쟁의 역사이다.
고리울내, 베르내, 붕어내, 돌내, 구지내, 용문내 같은 굴포천, 안양천 지류에서 농사를 지었다. 굴포천 본류에는 서해조수가 하루에 두 번씩 흘러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굴포천 상류에 해당하는 이들 하천에는 보(湺)를 막아 서해 짠물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그 물로 농사를 지었다. 
대장마을, 멧마루, 고리울 지역이 이 보(洑)의 역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부평군 전체 9개의 보(洑))에서 6개의 보가 이들 지역에 몰려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도에 출간한 조선지지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부평군 주화곶면 대장리에 방오리보(方五里洑), 새보둑인 신보(新洑)가 있었다.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에 원종리보(遠宗里洑), 수역리보(壽域里洑), 원종리후보(遠宗里後洑)가 있었다. 부평군 하오정면 고리동에 고리동보(古里洞洑)가 있었다.

● 멧마루보인 원종리보(遠宗里洑)
멧마루 지역엔 원종리보(遠宗里洑)는 조선지지자료에 60여년 전에 축성한 걸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1851년 경에 만들어졌다. 철종 2년째이다. 국가에서 만든 보가 아니라 민간 개인이 축성한 보이다. 이 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막대한 돈을 들여 보를 막을 걸 보면 당시 멧마루 지역에 살던 지주로 보인다. 이 보에서 연결된 앞보뚝, 뒷보뚝까지 막아 농토를 확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기도 했다.

이 보(洑)는 서해조수가 올라오는 것을 막고 베르내를 막아 농수로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일차적으로 한강에서 굴포천을 거슬러 올라온 서해조수를 대장마을 앞 신보, 방오리보가 막았다. 3번째로 막은 것이 원종리보이다. 그러기에 원종리보의 물은 서해조수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민물로 보인다. 베르내엔 이 원종리보 위에 새기보인 수역리보(壽域里洑)도 같은 해에 만들어졌다. 새기보인 수역리보는 베르내의 다섯 번째 보이다.

▲ 원종리보가 있던 곳

항상 개울물이 흐르는 베르내에 보(洑)를 막으면 수량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 개울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저 보만 막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보 주위에 농사를 짓기 위한 둑을 막았다.
원종리보의 위치는 나루터인 거칠개가 있던 곳이다. 이 지역에 원종리보를 막아 수량이 많아지자 그 위쪽에 있던 논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 원종리보가 있던 베르내

멧마루 앞쪽에 있다고 해서 앞보뚝이라고 했다. 앞보뚝은 동문 5차 아파트, 영화아파트, 주공아파트, 원종중앙시장 근방까지 이어지는 둑이었다. 원종리보에서 생긴 베르내의 물줄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둑을 쌓은 것이다. 원종동 129-1, 129-6, 28번지 일대이다.

▲ 앞보뚝의 위치

중보뚝은 방오리보의 혜택을 받기 위해 둑을 쌓은 것이다. 오정대로였다가 지금은 봉오대로 너머까지 포함된다. 
이 근처에는 솔밭으로 불리는 조경밭이 있다. 그리고 중보뚝 바로 아래에 있던 논을 안군논이라고 한다. 보 안쪽으로 깊이가 깊은 논이라는 뜻이다. 원종동 87-1,2, 90-1,2번지 일대이다.

▲ 중보둑

● 멧마루 뒤에 있는 원종리후보(遠宗里後洑)
원종리후보는 원종리보 보다 40년이 늦게 축성되었다. 원종리보가 있는 곳에 뒤보뚝이 연이어 있어서 이곳의 논에 물을 댔다. 조선 지지 자료에 원종리후보(遠宗里後洑), 민간 개인이 만든 보로 되어 있다.

▲ 원종리후보

원종에서 공항가는 길에서 오정대로였다가 봉오대로로 바뀐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리울내가 흐르는 곳으로 보를 막기에 적당한 곳이다. 현재 고강교(古康橋)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고강동으로 소속이 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용구리와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사루지에서 내려오는 하천물과 강장골, 식골에서 내려온 물이 만나는 가루지골이 맞닿아 있다. 원종 11-1,2, 12-1 일대이다.
원종리후보에서 동진아파트 일대까지 둑이 쌓여졌다. 이를 뒤보뚝이라고 부른다. 현재도 이 일대엔 논이 조성되어 있다. 동부간선수로를 통해 한강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있다. 요즘에는 논 대신 밭을 많이 조성해서 야채 등을 제배하고 있다. 이 들을 가리켜 뒷버들이라고도 부른다.
● 새기보는 어디에 있었을까
새기보 수역리보(壽域里洑)라고 한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에 위치해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원종리보, 고리동보와 같이 철종 2년인 1851년 경에 축성되었다. 물론 개인이 만든 보이다.
그 위치는 새기마을 앞에 있었다. 그러기에 새기보라는 명칭을 얻었다. 새기마을에서 보를 막을 수 있는 하천은 베르내이다. 베르내가 새기마을 앞으로 흘렀는데 그걸 막아 농사물로 썼다. 새기 마을 위쪽의 농토에 물을 공급했다.
그 위치가 문화아파트 앞 베르내로 보인다. 베리내사거리에서 조금 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 베르내는 복개되어 성오로로 되어 있다. 하천이 도로로 명기된 것이다. 단지 복개되어 있다는 이유이다. 물론 도로이지만 도로명에 베르내를 명기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한다.
언젠가는 이곳 베르내도 복개에서 풀어주어 옛모습 대로 복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베르내가 온전하게 부천시민들에게 선 보이게 될 것이다. 이때 멧마루보인 원종리보, 새기보인 수역리보도 복원했으면 한다. 이들 보들은 베르내의 수량을 풍부하게 해서 예전처럼 아이들이 수영도 하고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 방우리번덩인 방우리들인가? 방오리들인가?
멧마루엔 두 개의 큰 들판이 있다. 이 들판은 아직 도시개발 바람을 타지 않아 논으로 남아 있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탓이다.
멧마루 앞쪽에 멧마루보인 원종리보로 인해 생겨난 들이 있다. 이 들판을 예전에는 방우리번덩이라고 했다. 앞보뚝, 중보뚝이 새로 생겨나게 되면서 이 일대를 방우리번덩에서 이어받아 방우리들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방우리번덩이나 방우리들은 같은 말이다.
방우리번덩은 조선지지자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방우리들이 기록되어 있다. 한자로는 영야(鈴野)이다.
방우리번덩은 멧마루 남쪽 부천원일초등학교, 삼경아파트였지만 지금은 원종금호어울림아파트, 동문아파트 서쪽, 영화아파트, 원종고등학교, 원종중앙시장 앞까지 펼쳐져 있던 들이다. 지금은 이들 건물 앞쪽만 들판으로 이뤄져 있다.
주로 앞보뚝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95년도에 발행한 오정구의 문화와 지명유래에 실린 멧마루 지역 지도에 그 위치가 실려 있다.
방우리번덩에서 번덩은 제법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가리킨다. 버덩이 번덩으로 조금 변형되었다. 이렇게 번덩이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면 지대가 조금 높지만 갈대밭이 천지인 들판이라는 걸 가리켜 준다. 원종리보가 만들어지기 전의 모습과 일치한다. 원종리보가 만들어지면서는 갈대밭이 조금씩 논으로 만들어져갔기에 풀만 우거진 들판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이 버덩에 대해 써온 탯말이 있다. 강원도에선 버당, 경남지역에선 번덕, 함경도에선 버덜기, 제주도에선 번데기, 경기도 용인지역에선 번던이라고 했다.
멧마루에서 쓴 ‘번덩’이라는 탯말로 인해 방우리번덩이 방우리들이 생기기전부터 써온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오랜세월 멧마루 사람들은 마을 앞에 있는 갈대만 무성한 들판을 가리켜 방우리번덩이라고 한 것이다.

● 방우리번덩에서 ‘방우리’의 의미
방우리번덩에서 방우리는 무엇일까? 대장마을 앞에 있는 방오리보에서 유래하는 방오리일까? 아니면 우리말 방울, 방올일까? 방오리보가 있었다는 곳에서 방우리번덩이 오리쯤 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방우리번덩이라는 말이 앞선 것인지... 방오리보가 앞선 것인지를 따져 보면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방오리보는 멧마루보인 원종리보가 만들어지기 전인 1890년 경에 축조되었다. 방오리보가 만들어지면 그 일대에는 번개들이라는 들판이름이 지어졌다. 멧마루 원종리보는 방우리번덩, 방우리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니까 방오리보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방우리들, 방우리번덩은 불려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방오리보까지 오리(五里)가 된다든지 십리(十里)가 된다든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방우리번덩에서 ‘방우리’는 어원적으로 ‘방울, 방올’을 가리킨다. 방울은 삼한시대 이전에 청동칼, 청동거울과 더불어 신성한 영물로 여겼다. 그러기에 방우리번덩 지역은 비록 풀이 무성한 들판이기는 하지만 뭔가 신성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판 언저리에 방울을 걸어 놓은 곳이 있는 것은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방울을 달아 놓는 것은 솟대이다.
이 솟대는 헐떡고개라고 하는 성터골, 성재너머 위 성재에 세워져 있었다고 보여진다. 성재를 헐떡고개라고 부르는데 이는 솟대고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통 헐떡고개의 원형은 활터고개이고, 이 활터고개는 솟대고개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활을 쏘는 고개라고 해서 활터이지만 실제는 솟대고개라는 것이다. 보통 활터고개를 헐떡고개로 많이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저히 마을 입구여서 활을 쏠 수 없는 곳에도 이런 헐떡고개, 활터고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기에 멧마루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솟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솟대에 방울이 영물로 걸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지는데 그 솟대 아래에 있는 들이라는 의미에서 방우리번덩이라는 땅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방우리번덩이 있는 위쪽에 멧마루 도당우물이 있다. 이 우물에선 매년 멧마루도당우물제가 열린다. 방우리번덩엔 미나리꽝이 있고 벼농사를 짓는 들판이 이어져 있다. 이곳이 최근 행복주택 단지로 지정되어 조만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방우리번덩 전체가 송두리째 주택단지로 변모를 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방우리라는 땅이름은 충남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方佑里), 충북 제천군 금성면 성내리 방우리,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황조리 황새터 남서쪽에  있는 방우리가 있다. 그리고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질원리 구룡동과 도전동 사이에 있는 방우리 버덩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