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애견 마을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해서 포미라고 불렀다. 몸무게가 1kg밖에 안 되고 하얀 털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어리고 예쁜 포메라니안이었다. 마당에는 7년 된 진돗개 메리가 지키고 있었고 포미에게 거실에다 집을 마들어 주었다.
종일 집에서만 따분하게 지내는 남편을 위한 배려일 뿐 나는 원래 개에 대한 호감이 없어서 만질 때마다 손을 씻곤 했다. 어느 날 밤 거실에 나갔더니 포미가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고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서 달달 떨고 있었다.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춥고 무서워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포미와의 눈 맞춤으로 깊은 교감을 체험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다시 포미를 끌어안게 된다. 엄마 품에서 형제들과 몸을 맞대고 포근함에 취해있던 애기가 아닌가? 무정하게도 그 어린 것을 데려다가 적응도 하기 전에 썰렁한 거실에 혼자 두고 불을 끄고 나만 방에서 잠을 잤다. 무정한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다.  얼른 포미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포미는 안심하는 듯 품 안에서 잠이 들었고, 그때부터 이불 속에서 안고 자게 되었다. 새근새근 잠자는 숨소리가 꼭 손녀의 어릴 때 모습과 같았다. 맑고 까만 눈동자는 예쁘다 못해 청순하기까지 했다. 포미와 눈 맞춤이 있었던 후부터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는가보다. 포미에게 드는 비용이나 수고가 아깝지 않고 용변을 처리할 때도 더럽지 않았다.

 얼마 전에 이웃에 사는 영수 엄마가 상담을 요청해왔다. 시댁에서 분가하여 살다가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는데 너무 힘이 든다고 했다. 이유 없이 어머니가 싫어져서 괴롭다는 것이다. 퇴근하여 귀가할 때면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얼른 신발을 벗고 자기 방으로 향한다고 했다. 별 말썽도 없으신데 그저 존재 그 자체가 싫다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산 경험이 없는 나는 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성경 룻기의 주인공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일찍 남편을 잃은 며느리 룻에게 자신은 고국으로 돌아가겠으니 너는 친정으로 가서 재혼하라고 권유했다. 그러자 룻은 극구 사양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 장사 되는 곳에서 나도 죽어 장사될 것”이라며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그는 후일에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전무후무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그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까? 그도 효도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스물아홉에 청상과부가 되어 수절하며 일생을 마치신 어머니의 삶을 돌아본다. 어린 자식 삼 남매와 노모를 모시고 가장이 된 어머니의 삶은 극기 그 자체였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고부관계는 너무도 가깝고 훈훈하기만 했었다. 어쩌다 며느리가 병이라도 나면 할머니는 어머니가 쾌차하기까지 금식 기도를 하셨다. 반면에 어머니는 늘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을 하셨다. 두 분은 진정 현대판 룻기를 쓰신 분들이었다. 이 끈끈한 사랑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한국 전쟁 후유증으로 갑자기 삼 대 독자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는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통은 남편을 잃은 슬픔 위에  더욱 가중되어 갔을 것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올망졸망한 어린 손자들이 보이고 꽃다운 며느리가 한없이 불쌍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후에 할머니는 마음을 다잡고  며느리를 돕기로 작정을 하셨다고 한다. 두 분은 눈물겹도록 서로를 위해주고 아끼며 폐허 위에 가정을 세워갔다. 남자가 없는 허술한 둥지에는 두터운 사랑의 벽을 만들어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았다. 며느리의 지극한 효도를 받으신 할머니는 80세까지 장수하시고 고인이 되셨다. 78세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는 지금도 할머니와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계실 것으로 믿어진다.

 영수 할머니는 그 후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영수 엄마의 마음이 홀가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해 드렸을 텐데 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데,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을 왜 그토록 힘들어 했을까? 하는 회한 때문인지 그는 많이 울었다. 악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어머니와 진지한 사랑의 눈 맞춤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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