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만니들(乾滿野)
멧마루에 건만니들(乾滿野)이 있다. 이 들은 조선지지자료에 부평군 하오정면 원종리에 있다. 한자로 건만야(乾滿野), 우리말로는 건만니들로 표기되어 있다.
건(乾)은 뜻으로 읽지 않고 소리음을 취한다. 그러기에 ‘건’은 우리말 ᄀᆞᆷ에서 유래한다. ᄀᆞᆷ은 대부분 산을 뜻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청동기 시대 이후에는 마을을 다스리는 족장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ᄀᆞᆷ에서 ‘감, 검, 곰, 금’으로 변천을 해왔다. 
한자로는 가마 부(釜), 까마귀 오(烏), 가마 교(轎), 더할 가(加), 깨달을 오(悟), 검을 흑(黑), 고마(古馬), 곰 웅(熊), 쇠 금(金), 봉함 검(檢), 검을 현(玄), 거미 주(蛛), 마을 건(乾), 거문고 금(琴), 검을 흑(黑) 등이다.
건만니들은 곰달내가 뻗어내려온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까 원종리후보가 위치한 곳이다. 원종리보에는 방우리번덩인 방우리들이 있다.
보통 뒷벗들로 알려진 곳이다. 뒷벗들은 멧마루 마을 뒤에 넓게 벋어있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 들판이 건만니들로 고리울 마을까지 이어진다. 현재도 고리울 마을 초입까지는 도시개발이 되어 있지만 건만니들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 용구리의 의미
용구리는 멧마루 마을에서 오쇠리인 밖오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들이다. 원종동 24-1,2,3번지 일대이다. 오정대로였지만 지금은 봉오대로인 원종 톨게이트 서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이곳엔 곰달내인 고리울내의 두 지류가 합류해서 흐르는 곳이다. 두 곳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어서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지금도 장마철이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많은 물이 흘러간다. 더구나 이곳엔 조선시대 후기에 원종리후보가 축성되었다.
동쪽으로는 뒤보뚝이 자리를 잡고 있고 이 둑을 발판으로 삼아 건만니들(乾滿野)가 펼쳐져 있다. 이 뒤보뚝은 현재도 건재하다. 세월이 흘러 변천의 겪기는 했다.
서쪽으로는 방우리번덩인 방우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후기 보(洑)가 축성되기 전에는 서해조수가 흘러들어온 곳이었다. 이 서해조수가 빠질 때면 이곳에 큰 못이 생겼다. 그 못을 가리켜 용구리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용구리는 용굴이에서 파생된 말이다. 용굴이 어원이다. 전남 여수에도 용굴이 있다. 이곳엔 실꾸리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깊은 웅덩이를 가리킨다. 
동남쪽으로는 낮은 봉안산 자락이 길게 뻗어내렸다. 일제강점기 1919년에 발간한 지형도를 보면 곰달내인 고리울내 지류가 이곳에서 합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개울을 가로질러 오쇠리인 밖오시로 가는 연로(聯路)가 있다. 현재는 고강교를 건너가는 소사로가 이어지고 있다. 이 소사로엔 일제강점기에 가로수로 심어놓은 수양버들이 있다. 오래된 나무여서 도로가 새롭게 변모해도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소사로를 넓히거나 하면 아마도 이 수양버들은 제 일착으로 사라질 운명일 것이다.

▲ 용구리 지역

 
용은 해신의 그 용이다. 해신은 용궁신, 해룡신, 미륵신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미륵은 미르에서 나온 말로 용을 미르라고 한다. 미르는 땅이름에 별로 쓰이지 않고 직접 용이라는 말이 쓰였다. 미르는 고려후기 이후에 사어(死語)가 되고 대신 ‘미리’의 형태로 남아있기는 하다.
용은 땅이름에서는 ‘크다’는 말로 쓰인다. 구리는 굴로 골짜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용구리하면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용이 해신을 뜻하므로 물이 있는 큰 골짜기를 뜻한다. 이곳이 큰 골짜기 같은 못이어서 서해조수 때에는 썰물 때 조개를 잡으러 가다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어 경계의 대상이었다. 현재는 큰 못이 메워져 없어졌다. 봉오대로가 만들어지면서 봉안산 자락이 잘라져 작은 솔섬으로 남았다. 이곳이 쉼터로 자리를 잡고 있고 그 곁으로 논들이 만들어져 있다.
전국에서 용구리라는 땅이름은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평창리에 있는 용구리 마을이 있고,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용구리 앞에 있는 들을 용구리들이라고 한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용곡리 용구리인데 이를 용구지라고도 한다.

● 방아가리의 뜻은?
방아가리는 원종 118-3번지에서 119-1번지 일대이다. 현재 원종2동 동문5차 아파트, 영화아파트 앞 일대이다. 멧마루에서 오정마을로 가는 길 북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도 이곳엔 논이 밭으로 바뀌어 있는 곳이 있고, 그대로 논으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 행복주택이 들어선다고 해서 부천의 그린벨트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 방아가리 지역

방아가리는 방아갈이가 원형이다. 뒤의 ‘갈’은 갈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이 멧마루보인 원종리보가 들어서기 전에는 갈대가 무성하던 곳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갈대가 무성했기에 논이 만들어지기 전이라는 말이다.
멧마루에서 오정마을로 가는 길을 가리켜 ‘방아다리길’이라고 한다. 방아가리, 방아다리가 거의 함께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멧마루대동우물에서 부천원일초등학교를 거쳐 영화아파트를 거친 뒤 동문5차 아파트를 지나 오정대공원에 이르는 길이다.
다리는 실제 다리인 ‘다리 교(橋)’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리의 원형은 산이라는 뜻인 ‘ᄃᆞᆯ’로 이게 다, 달, 돌, 들, 닥, 딱, 당, 땅, 댕, 닭, 대, 때, 등으로 변모했다. 산으로 시작해서 땅이라는 말로 변화하고, 들판이라는 말로도 변모했다. 그러기에 멧마루 방아다리는 디딜방아를 닮은 들판이라는 뜻이 맞다.

다라래, 다라리, 다라실, 다랭이, 다롱이, 다리목, 다리골, 다랫골, 대룻골, 닥골, 닥실, 딱골, 닭굴, 다악굴, 닥개, 때깨, 닥고개, 당고개, 땅고개, 땅재, 닥내, 닭내, 당내, 닥머리, 닭머리, 당머리, 닥말, 닥몰, 당머리, 당뫼, 땅골, 닥밑, 당밀, 댕밑, 닥섬, 닭섬, 딱섬 등이다.

방아는 디딜방아를 닮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디딜방아는 양쪽으로 다리가 벌려져 있다. 이 다리에 발을 올려 놓고 방아를 찧는다. 이 다리가 한 곳으로 모아진 곳에 방아공이가 심어져 있다. 이 방아공이로 벼를 찧어 껍질을 벗기는 일을 한다.
멧마루는 방아가리이지만 전국에는 방아다리라는 땅이름이 많다. 여기서 다리는 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디딜방아를 닮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방아가리는 디딜방아를 닮은 갈대밭이라는 뜻이다.
 

● 그럼, 방아가리에 방앗간이 있었나?
방아가리는 방아가저라고도 한다. 방아가 있는 터를 방아기저라고 한다. 해방 후에는 연자방앗간이 이곳에 두 개나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자방앗간을 본 사람은 없다. 단지 들은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방아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에 불과하다. 1977년도에 국립지리원에서 인쇄한 지도에 보면 이곳에 아무런 시설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지도에도 이곳에 방앗간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만약에 방앗간이 이곳에 있었다면 지대가 너무 낮아 수해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두 개나 연자방앗간이 있었다면 그 규모가 제법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원종리보를 막아 수량이 풍부해서 이 수량을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었다면 모를까 연자방앗간은 그저 땅이름을 이용해서 창작한 것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 멧마루 웅덩이인 둠벙
멧마루에 둠벙이가 있었다. 멧마루 웅덩이라고도 한다. 멧마루에서 방아다리길을 따라 가다가 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이었다. 이 저수지는 부천원일초등하교를 지나고 주공아파트를 지나면 영화아파트 조금 못 미친 곳이었다.
이 둠덩은 1977년도 6월에 국립지리원에서 인쇄한 지도에는 없다. 1977년도에 편집했지만 1983년도에 수정한 지도에는 둠벙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9년도 지도까지 이 둠벙이 표기되어 있다. 이 둠벙은 영화아파트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영화아파트는 1998년도 4월에 입주했다. 원래 이름은 부천원종아파트였다. 1997년도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이 저수지가 사라지고 부천원종아파트가 그려져 있다. 이 둠벙은 최소한 1996년도후반기에는 사라졌을 것이다. 1996년도 지도에는 둠벙이 표기되어 있다.

▲ 1977년도 편집 1987년도 수정한 지도에 웅덩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둠벙은 1978년도 정도에 굴착되어져서 멧마루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분들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님을 나타내주는 것은 이 둠벙에서 베르내까지 직선으로 둑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멧마루 둠벙은 봄이면 농사짓는 요긴했다. 이 둠벙의 물을 양수기로 퍼내서  못자리 물로 썼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수영을 했다. 주로 멧마루 아이들, 새기 아이들이 와서 수영을 즐겼다. 아이들은 둠벙 둑에서 뛰어내리는 다이빙을 즐겼다. 하지만 둠벙에 잘못 뛰어내릴 때는 머리가 웅덩이 바닥에 쳐 박히기기도 했다. 둠벙 바닥이 찰진 뻘흙이었기 때문이다. 이 뻘흙은 오랫동안 서해조수가 들락거리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용구리에 있던 원종동 양수 펌프장

가을 농사가 끝난 뒤에 마을 사람들은 양수기로 둠벙 물을 퍼내었다. 이 두벙에서 붕어, 뱀장어, 메기, 참게 등을 잡았다. 이렇게 저수지 물을 빼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다. 여러 양동이를 잡은 민물고기를 가지고 매운탕 등을 끓여 먹었다.
웅덩이가 논 가장자리나 가운데에 있는 것을 둠벙이라고 한다. 멧마루 웅덩이는 이 둠벙 수준이었다. 다른 말로 용탕이라고도 한다.
웅덩이가 아주 작은 것은 옹당이다. 웅덩이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은 움파리이다. 이 움파리는 신발을 적실 정도로 작은 웅덩이다. 수렁은 곤죽이 된 개흙이 물과 섞여 있는 웅덩이다. 쇠지랑탕은 소의 오줌물이 흘러들어가 물이 썩어가는 웅덩이이다. 보통 이 물을 거름으로 쓴다. 밀물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괴어있는 것을 굴포라고 한다. 굴포천이 김포의 굴포에서 유래했다. 폭포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물받이로 팬 웅덩이는 용두리라고 한다.
멧마루 둠벙 보다는 크고 늪보다는 작은 것이 못이다. 연꽃이 피는 것은 연못이다. 인공적으로 제방을 막아 물을 가둬놓는 것은 방죽이다. 이를 저수지라고 한다.

이 멧마루 저수지를 가로질러 농수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철제 통으로 만들어진 농수로로는 농사에 쓰이는 한강물이 흘렀다. 대장마을 앞에서 갈라진 수로가 원종양수장에서 양수기로 퍼 올려져 멧마루 앞까지 왔다. 이 물이 농수로로 연결되어 방우리번덩인 방우리들 곳곳으로 보내졌다.
‘이 농수로 다리를 가리켜 빨간다리라고 했다. 철제통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져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부천문화원 발행 마을지3, 대장동, 원종동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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