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이 눈앞이다. 겨울 김치를 준비하는 김장을 하기 위해 입동이 기준이고, 그해 겨울 날씨를 점치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입동에 날씨가 추우면 맹동(孟冬)이라는 것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고사를 지냈다. 어린 시절 새 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토광· 터주단지 등에 가져다 놓았다가 먹고, 이웃과 나누어 먹기 위해  동네 이웃집에 떡을 나르던 어린 시절 기억이 삼삼하다.

새삼 ‘포용(包容)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아량과 너그러움으로 남을 감싸고 받아들이는 의미로, 그 안에 포함된 아량은 깊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일컫는 아름다운 말이다. 혼자 생각으로는 포용은 행위 쪽에 가깝고, 아량은 정신에 근접하다고. 아량이 앞서야 넓어질 수 있고 그 후에야 포용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이다.

다시 깊은 상상으로 포용은 베푸는 쪽과 베풂을 받는 쪽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라고 한다면(아량도 넓게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계급(지위와 권한의 의미적인 차원에서)적인 단어이고 행위이며 정신이라는 의미가 강하기도 하다. 해서 포용은 가름과 나눔을 통한 서로가 주고받기의 거리와 괴리를 느끼게 하는 차별의 단어라는 생각이다.

지금 한국은 이념의 갈등과 분열의 깊고 넓은 터널을 지나는 과정은 아닌지 불안으로 미래가 자못 불투명한 것을 느끼는 것이 나만의 것인지 궁금하다. 포용 국가, 포용(적) 성장, 포용(적) 복지 등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자괴감이 앞선다. 포용은 때로 너그러움과 아량의 탈을 쓰고 다가오는 모멸감을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의미가 은폐되어 있을 수 있어서다. 상대가 결핍되고 부족함을 인정하라는 강요가 다분하고 그 배후에 우월적 지위라는 음험한 그림자가 선명해서다.

포용은 말하는 쪽과 들어야하는 쪽 모두가 먼저 인정의 단계를 공정하게 거쳐야 한다. 공정함에는 사실과 더불어 감성도 당연히 동반될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것은 아닐까. 포용은 주고도 기분이 좋아야하고 받고도 기분이 상하지 않아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행위이면서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정신적인 교감이고 수평적인 소통인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 배운 추수가 끝난 가을 달밤 시골 형제의 우애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또한 무엇 때문일까. 속 깊은 형제애가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어렵던 시절의 슬기로운 나눔의 아름다운 옛 이야기가 깊어가는 가을 밤에 포용이라는 의미로서 진정함과 진지함이 겹쳐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더웠던 지난 여름이 기억에 가득한데 가을도 없이 눈 내리는 겨울은 이미 와 버렸다. 입동이 아직인 데 겨울은 이미로 과거가 되 버린 것이 과연 자연일까. 아마 이 겨울엔 포용을 말하면 이미 포용은 진정한 포용이 될 수 없고, 포용 스스로도 자연이 아닌 자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달은 선명해지고, 잠이 멀수록 내일이 어두울까 꿈 또한 어지러움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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