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일제가 세운 신사(神社)와 신사(神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설립한 신사에 대한 강요된 참배가 있었다. 우리민족 고유의 불교나 유교를 배척하고 일본인들의 신앙을 믿도록 강요하는 일이었다. 한민족의 뿌리인 근본적인 종교, 사상까지 바꾸려고 강요하고 억압한 정책 중의 하나였다. 
일본신사는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로 나뉜다. 신사(神社)는 일본의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모신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까지 일본이 국교로 내세운 신도(神道)의 사당이다.일제는 불교나 유교 같은 종교적인 의미로 교(敎)를 붙이지 않고 도(道)를 붙였다. 그래서 아주 낯설지만 일본인들이 주로 믿는 종교를 가리켜 ‘신도(神道)’라고 한다.
반면에 신사(神祠)는 수많은 개인적인 신령을 모시고 있는 사당을 가리킨다. 집집마다 이 신사(神祠)가 있다시피 한다. 주로 조상신을 모시기 때문이다. 이것도 신도(神道)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신사(神祠)는 조선총독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건립했다. 반면에 신사(神祠)는 일본인 신도 신자들이나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를 비롯해서 일반인들이 받아들인 신도(新道) 신자들에 의해 건립이 되기도 했다.   
먼저 일제는 1917년에 ‘神祠에 관한 건인 신사사원규칙’을 공포했다. 이를 근거로 1920년 공사에 들어가 1925년에 완공된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일본인 신도(新道)의 총본산이었다. 이후 일제 패망 1945년 8월을 기준으로 전국의 신사(神社)는 82개소에 달했다. 이 신사(神社)는 서울 같은 큰 도시, 경기도 같은 도단위, 지방의 큰 도시를 중심으로 건립을 했다.
일반 신사(神祠)는 일제강점기 때 말단 행정단위인 면단위까지 강제적으로 신사를 건립하게 해서 총 1,062개소에 달했다.

▲ 소사신사가 있던 자리 심곡도서관 1986.03.01 준공

일제는 자기들 땅에 있는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는 각 지역에서 가장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했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여 시야가 확보되지 못하게 하는 은밀함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신사들은 각 도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릉에 입지해야 했다. 신사의 건물도 우람하게 지어 당시 조선인들의 거주하는 초가집이나 기와집에 비해 월등히 큰 건물을 짓게 했다. 이들 신사를 바라보는 조선인들이 주눅이 들도록 하는 통칳술을 구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신사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도록 배려했다. 실제 일본인들이 무시로 편하게 신사를 참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민족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는 아주 악랄했다. 각 도시마다 설립된 학교의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워 어린 학생들이 참배하도록 했다. 어릴 때부터 일본을 받들고 섬기도록 교육을 하는 것이다. 각 학교에서는 신사참배를 잘하는 친일 아이들을 중심으로 애국반이 만들어졌다. 이  애국반은 다른 조선인 학생들이 참배를 잘 하는지 감시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사참배를 잘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애국반을 꾸려 감시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이 가미다나(神棚)를 죽도록 싫어해서 대충 시늉만 하는데 그쳤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각 도시에 있는 신사에 한 달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방문해서 참배를 해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이 고역은 당시 조선 민중들 마음속이나 실제 독립 운동 과정에서 일제에 대해 치를 떨게 하는 작용을 했다. 
그래서 일제가 패망하자마자 전국에 있는 신사(神社), 신사(神祠)들이 하루 아침에 불태워지고 파괴되어 버렸다. 현재 일제의 신사는 절로 바뀐 것 몇 채를 제외하고는 사라져 버린 게 그 이유이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조선민중들은 치욕을 견디며 조선이 독립하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렸던 것이다.

● 부천군 행정 책임자였던 매국노이자 친일파 군수들
일제가 1914년 전국의 행정을 개편하면서 부평도호부에서 부를 따고 인천도호부에서 천을 따서 부천군이 탄생했다. 이에 부천군수들이 초대부터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 때까지 무려 10대가 민족반역자이자 뼛속까지 친일파로 오로지 일제를 위해 복무했다.
초대는 정인소(鄭寅韶)가 1914년 3월1일부터 1919년 6월 18일까지 복무했다. 2대는 양재창(梁在昶)으로 1919년 6월 19일부터 1921년 1월 12일까지 근무했다. 3대는 서정악(徐廷嶽)으로 1921년 1월 13일부터 1923년 3월 29일까지 복무했다. 4대는 강원달(康元達)로 1923년 3월 30일부터 1924년 12월 23일까지 근무했다. 5대는 김동완(金東完)은 1924년 12월 24일부터 1930년 2월 27일까지 근무했다. 6대는 김태석(金泰錫)으로 1930년 2월 28일에서 1933년 4월 6일까지 근무했다. 7대는 허섭(許燮)으로 1933년 4월 7일부터 1937년 11월 11일까지 근무했다. 8대 장영한(張永翰)은 1937년 11월 12일부터 1942년 6월 2일까지 근무했다. 9대 이윤세(李允世)는 1942년 6월 3일부터 1943년 3월 10일까지 근무했다. 마지막 10대 김홍식(金弘植)은 1943년 3월 1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건국위원회가 행정을 접수하기 지속했다.

▲ 자료사진,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들의 신사참배 모습

이들 군수들은 부천 전체에 행정력을 총동원해 일제의 강력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충실하게 실행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해방후에 잠깐 친일파 처단에 대한 민중들의 행동에 움추러 들었지만 친일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정권을 잡으면서 지금까지 별다른 체벌 없이 잘 먹고 잘 살아 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영원한 친일 매국노로 명예를 실추시켰지만 현실에선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일제 협력으로 일궈놓은 부(富)를 자손대대로 물려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 소사, 오정신사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 신사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으로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전쟁을 계기로 조선은 전시체제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전국토에서 전민중을 일본에 완전 동화시키려는 황민화정책이 실시되었다. 이 황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천황의 제사를 전국민에게 강요하는 국가신도 제사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36년에 ‘일도일열격사(一道一列格社)’를 실시하였다. 남산에 위치한 ‘조선신궁 이하 국폐사를 구축하였다.
일본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신사참배를 강제하기 위해 1936년 ‘일읍면일신사(一邑面一神. 祠)’ 정책을 실시하였다. 행정기관의 최하위 면 단위까지 신사를 건립하였다.
그런데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시체제하 물자의 부족으로 신사(神社)의 창건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이후 신사(神祠)의 창건률은 조선인 거주구역의 읍·면장의 주도로 소학교의 공조 하에 급격히 증가하였다. 부천 같은 소사심상소학교, 소사보통학교가 이와 같은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1910년까지 일본 일왕의 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을 모신 신사는 약 47%에 불과했다. 일본인들 자신의 고향의 수호신을 모신다거나 일본의 민중에게 인기 있는 신사의 신들을 모신 신사는 44%였다.
반면 1915년 「신사사원규칙」의 발포로 조선총독부가 신사의 통제권을 장악한 후로는 민중에게 인기 있는 신사의 설립이 단절되었다.
전국에서 1916년부터 1929년까지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모신 신사는 91%에 달했다. 이후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모신 신사는 조금 줄어들어 총84%에 달했다.
이로 미루어 당연히 부천의 소사신사, 오정신사는 일왕의 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제신으로 모신 것이어서 당시 민중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신사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 소사신사
일제강점기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성주산 옆 화오개산 중턱에 소사신사가 표기되어 있다. 이 지형도를 제작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마친 시점이 1918년도까지 이므로 그 이전에 이미 소사신사가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신사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해서 설립된 것이 아니다. 당시 깊은구지인 심곡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소사신사의 건립연도는 1938년도로 되어 있다. 중일전쟁 시기인 1938년에 들어서서 조선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의해 일본 일왕을 지탱해주는 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에게 참배하는 신사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신사의 규모나 그 이후의 규모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건물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 소사신사가 있던 자리 육각정, 심곡도서관 이전 모습

이 소사신사를 화오개산 중턱에 세운 것은 당시 계남면, 오정면 민중들이 천황에게 절대 충성을 맹약하게 하고 천황에 대한 숭배를 늘 각인시키기 위해 그리한 것이다.
사실 소사신사였는지 명칭도 불분명하다. 건립 당시에는 이 지역이 계남면이었기에 아마도 계남신사라고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후 1941년 계남면에서 소사면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신사의 명칭도 소사신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소사신사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현재 부천남초등학교 전신인 소사심상소학교하고 부천북초등학교 전신인 소사보통학교 학생들이 참배를 해야 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오개산 중턱까지 힘겹게 올라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에게 참배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였을 것이다. 여기에다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한 훈시, 교육 등으로 지칠 대로 지쳐 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소사신사, 오정신사를 건립하고 이를 시행하도록 독려한 것은 당연히 당시 천하의 매국노이자 친일파였던 부천군수였다. 1938년도에 군수가 되어 부천군민들을 거세게 몰아부쳤던 이는 8대 군수 장영한(張永翰)이다. 이 악독한 장영한은 자국민에 대한 이해나 생활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한 채 오로지 일본 일왕 편에 서서 핍박하고 억압했다.
소사신사는 해방후 부천군민들에게 의해 순식간에 부서지고 불태워져 사라져 버렸다. 그 뒤 소사산사가 있던 자리에 육각정 정자가 들어서서 부천을 굽어보는 역할을 했다. 이후 부천심곡도서관이 자리를 잡아 부천시민들의 독서와 여가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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