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

작은 시골이 지겨워서 도망치듯 도시로 떠난 그녀가 27살의 노처녀가 돼서 선 자리에 앉았다.

 

멀찍이 앞서 팔자걸음으로 걷는 저 삽다리 총각이 장남이 아니라 좋았다. 오랜 도시 생활에 지친 덕에 순박한 시골 총각도 좋다고 생각했다. 맞선을 본 그날, 약혼 사진을 찍었다. 20일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삽다리 총각은 도시로 돈 벌러 떠났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쯤 오는 손님이 되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그의 노모와 조카들 그리고 아내를 남겨 둔 채였다. 남겨진 그녀는 이제 이전의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첫째로 딸이 태어났다. 둘째도 딸이 태어났다. 셋째도 역시 딸이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그만 낳는 게 좋았을 텐데.. 엄마는 아들을 꼭 낳아야 했다. 딸이 태어나면 태어날수록 오기가 생겼다. 멀리 떠나 있는 아빠 때문이기도 했다. 시어머니의 한숨 때문이기도 했다. 능력만 되면 첩을 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 불안한 엄마는 아들이 필요했다.

 

그 당시 윗집 보미네와 아랫집 우리 집은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아들 낳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윗집에서 쿵" 하고 북을 치며 딸을 낳으면 아랫집인 우리 집에서 딱"하고 딸을 낳고 우리 집에서 쿵" 하고 딸을 낳으면 윗집에서도 딱"하고 딸을 낳았으니
"쿵딱 쿵딱 쿵딱"
6년에 걸친 서편제 급의 애잔한 장단은 아들을 낳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제 넷째를 임신한 엄마, 아빠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아이에게 남자 이름을 먼저 지어주는 것이다. 남자 이름을 미리 받은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발길질을 할 때마다 엄마는 그 힘찬 발길질이 사내아이임을 확신하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투덜의 탄생
음력 6월, 더운 여름 아침에 넷째로 태어난 내가 꼭 달고 나왔어야 할 그것을 달고 나오지 않아서 어른들은 한숨을 쉬었다. 낑낑거리는 내 얼굴을 이불로 덮었다가 자신이 한 일에 놀란 엄마는 재빠르게 내 얼굴에서 이불을 치우고 딸 넷을 낳은 자신의 팔자를 한탄했다.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아기 콧대가 이리 높은 걸 보니 보통이 아닌 애가 될 거라고 말했다지만 그게 큰 위안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후, 윗집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니 역시나 중요한 걸 달고 나오지 않은 내 친구 보미다. 이로써 애잔한 장단은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 아직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으니

 

3년 후, 더운 여름 새벽, 엄마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아이가 나오려고 하고 있다. 엄마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을에 하나뿐인 의사인 윤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지금껏 아이 넷을 낳는데 의사가 온 것은 처음이다.
고통 속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다.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벽장에 숨겨둔 꽁짓돈을 언니들 손에 한 장, 한 장 쥐여 주었다. 자그마치 만 원짜리를... 언니들은 만원을 손에 쥐고 동네 가게로 내달렸다. 아직 새벽이라 열리지 않은 가게 문을 두들기며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우리 아들 낳았어요!"
"우리 아들 낳았어요!"

이제 더 이상 쿵 닦은 없다. 엄마의 승리다. 우리 집은 잔칫집이 되었다. 그 시간에 3살인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나는 기억이 없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건넛방에서 잠이나 자고 있었겠지. 내 동생이 태어난 그 새벽에. 나 역시 투덜이로 다시 태어났다.

내 동생
명절 제사를 마치고 온 식구가 제사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아직 아기인 내 동생이 오줌이 마려운지 강아지처럼 낑낑거린다.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동생의 바지를 내린다. 거침없이 상 위의 쇠 밥그릇에 오줌을 받는다. 아까부터 바로 옆에 앉아서 이를 지켜보는 내 눈에 샛노란 오줌이 밥그릇 속에서 찰랑거린다.

 

할머니와 어른들은 내가 남동생을 봐서 이쁘다고 했다. 내가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이뻐하는 이유가 내 동생 때문이라니... 동생이 태어나기 전, 3년 동안 내 신세가 어땠을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엄마는 눈치가 보여서 내 돌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앨범 속에 언니들과 동생의 돌사진이 가지런히 웃고 있다. 그 때문인지 어린 시절 몇 장 안 되는 사진 속에 나는 언제나 침을 흘리며 징징거리고 있다.

저녁밥 먹는 시간이 돼도 동생이 집에 오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들과 나는 온 동네를 뒤졌다. 옆집 어른들도 같이 동생을 찾았다. 엄마는 울기 직전이다. 엄마 따라 우리도 울기 직전이다.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 누군가 우리 집 보물을 훔쳐간 것처럼 온 동네가 들썩일 때, 동생을 찾았다. 내 동생은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친구 집에서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뿐이다. 동생은 종종 놀다가 가방을 두고 오거나 옷을 두고 오거나 했다. 이번엔 그냥 집에 가는 걸 잊었을 뿐이다. 나의 놀란 마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분노로 바뀌었다.

그 당시 나는 문 뒤에서 엿듣는 쥐처럼,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고 동정을 살피는 계모처럼, 딸과 아들을 차별 대우하는 엄마를 감시했다. 차별이 발각되면 최대한 시끄럽게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다. 엄마는 지랄 같은 나 때문에 몰래 특별대우를 해야 했다. 언니들과 나의 도시락 반찬과 내 동생 도시락 반찬이 다른 것을 발견해 낸 것도 나였다. 우린 대부분 김치 반찬이었는데 내 동생 반찬은 소시지나 햄 이런 식이었다. 물론 발각된 반찬은 내가 들고 잽싸게 학교에 갔다. 그래서 엄마는 반찬 차별을 멈추었다.

내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엄마는 나름의 노력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새로 산 손수레 정면

 

에 주인 표시를 하느라 내 동생 이름을 써넣으면, 나를 의식해서 옆면에 내 이름을 써넣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생에게 종종 치사한 짓을 하거나 주먹질을 하거나 협박을 했는데...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동생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동생을 따돌리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언덕을 구르다가 돌부리에 찍혀 무릎에 피가 나고, 동생이 포기하고 사라질 때까지 오랜 시간 풀숲에서 숨어 있어서 모기에 물리기도 했다. 하여튼 나는 열심히 뛰어 놀기도 바쁜 시절에 엄마를 감시하고 동생을 따돌리느라 참 피곤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엄마의 일기

 

책장에 꽂혀있던 엄마의 일기를 읽었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읽은 엄마의 일기는 다 읽고 나니 먹먹해져서 내 모든 장난기는 사라졌다.
아빠가 돈 벌러 도시로 떠나버리고 낯선 곳에 남아서 느꼈을 외로움, 그리움, 원망이 그대로 느껴졌다. 거기에 등장하는 나는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어디서 싸움질을 했다거나 해서 엄마의 고단함에 열심히 일조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한숨 속에 내가 있었다. 드디어 책장을 넘겨 발견한 엄마의 기쁨은 역시 내 동생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가 숙여져서 엄마의 일기를 덮었다.

내 동생은 그냥 아들이 아니다. 엄마의 기쁨이다. 버티게 하는 힘이다.

벽걸이 사진
"쟤가 지금은 저래도 어릴 적엔 정말 예뻤지"
언니들은 종종 동생을 놀리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내려간 시골집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벽에 걸린 사진을 보았다. 벽 중앙에 내 동생 돌사진이 걸려 있다. 그리고 벽 끝에 내 고등학교 사진이 걸려있다. 배치가 좀 이상한데 그냥 못이 있는 자리에 사진을 걸어 놓은 것이다. 이 배치는 15년도 더 된 것 같다. 새로 산 손수레 중앙에 내 동생 이름을 써넣고 옆에 내 이름을 써넣은 것 같은 배치다. 웃음이 난다. 가끔 이 사진들을 보긴 했는데... 오늘은 내 동생 사진을 유심히 바라본다. 내 동생이 말갛게 웃을 듯 말 듯 앉아 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년이 된 내 동생은 참 예쁘다. 내 동생이 예쁜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질투의 화신으로 긴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껏 내 동생이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 동생은 내년 봄이면 세 아이의 아빠가 된다. 사진 속에 아기 같은 아이가 셋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다. 너무 긴 시간을 투덜거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내가 웃긴다.

 


<언니네 글밭>은 2017년 여러가지연구소에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소통하고자 글 씨앗을 뿌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입니다. 작은 책으로 출판한 언니네 글밭의 글을 콩나물신문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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