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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아, 사랑해.-1
연은미  |  kongpap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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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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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영웅 영숙이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옹색한 시골집에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으레  동네 여자아이들의 이름은 영자, 말자, 순자, 경자 등... 비슷비슷했다. 
나보다 스물 셋이 많은 엄마의 이름은 영숙이다.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동네에 널린 이름이지만 그 의미와 애정은 각별했다.
외할아버지는 글을 깨나 읽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즐겨보던 책 중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연애책이 있었다던가,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영숙’이었다고 했다. 
‘여자 주인공 영숙이, 여자의 몸으로 세상을 구한 희대영웅’ 그 시절 여자 영웅 이야기는 드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영숙’이라는 이름은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다. 엄마는 결혼할 때 혼인신고하면서 호적신고가 안 되어 있고 연자라는 이름으로 살고 계신 걸 알았다고 했다. 엄마보다 두 해전에 태어나 죽은 언니의 이름이 연자이다.
얼마 전 이름에 관한 사연을 알게 된 나는 엄마에게 속상하지 않는냐고 물어보았다. 엄만 그 땐 다 그랬다면서 무덤덤해했다.  
  억울한 것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연자’로 살아온 엄마를 대신해 흔하지만 세상 어떤 이름보다 흔치않은 ‘영숙’이란 이름에 위로와 사랑을 보낸다.

1. 우리 영숙이는 선생님 시킬 거라...

“무심한 사람, 죽으려면 새끼들 낳기 전에 죽지! 어이구,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허으으...”
술병으로 돌아가셨다고도 하고, 맹장이 터져 죽었다고도 했다.
1961년 1월, 서른여섯 나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막내 동생을 잉태하고 있었다. 내가 일곱 살 때였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 살던 아버지 최기현, 엄마 김향화는 1925년생 열다섯 살 동갑내기에, 중매로 결혼했다. 나는 1954년 7월 28일 가난한 산골인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서 첫딸로 태어났다. 정확히는 셋째 딸이다. 내 위로 언니 둘과 오빠 한명이 죽었다고 한다. 죽음은 늘 주변에 있었다. 태어나면 사이사이 죽는 형제가 많았다. 그래서 여덟 살 위 큰오빠 종길,  두 살 아래 여동생 영자, 다섯 살 아래 남동생 종희가 살아남은 내 형제들이다.

막내를 유복자로 낳고 얼마 후 큰아버지가 엄마에게 아이들은 자기가 거둘 테니 재가하라고 하셨다. 누가 봐도 엄마는 젊고 약해보였다.
엄마는 노발대발 하셨다. “무슨 소리하는 기라? 내 새끼들 두고 어디를 가! 내가 키워. 내가!!”
서른여섯 여자는 그렇게 세상의 무게를 짊어 안았다.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을 내가 업어준 기억이 드문드문 있는데, 그 아이도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 금방 하늘나라로 가버린 것이다.

 엄마, 아버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아는 건 아버지가 그저, 6.25 전쟁에 나갔다가 다쳐서 집에 돌아왔고, 그 뒤로 농사 지으며 술과 여자 문제를 종종 일으키며 세월을 보냈다는 것뿐이다.
“니 아버지는 글씨를 잘 썼어. 한자도 많이 알았제. 마을에 계약서 써야할 일이 있으면 가서
대신 써주고 그랬어. “
아버지는 무엇을 보았을까? 가슴속에는 어떤 것들이 쌓였을까? 가슴속 열망을 펼칠 길 없는 전쟁과 가난의 굴레 앞에서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었던 걸까?
“그래도 네 아버진 너를 예뻐했다. 영숙이 크면 선생님 시킬 거라 했다.
 만날 니만 데리고 동네로 마실을 다니셨어.”
딸들을 잃고 내가 아버지 첫 딸이라 예뻐했던 걸까? 
“해 지면 너는 아부지 언제 오나 하고 동네 어귀에 나가 아부지를 기다렸어.”
 난 아버지 기억도 별로 없는데, 어렴풋이 장례 치르는 날 떡 받으러 간다고 천지도 모르고 좋아했던 것 같기는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음력 1월은 큰오빠가 막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쯤 이었다.
 어린 동생들 줄줄이에 아버지 없이 혼자 된 엄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장남인 오빠는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엄마를 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아들은 의지하는 남편이자 자기가 살 수 있는 미래였다. 엄마는 모든 집안 대소사를 큰아들과 상의했고, 막내아들은 없는 형편에도 금이야 옥이야 살펴 길렀다.
 한동안 큰오빠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모르는 엄마랑 동네 아줌마들을 데려다 글을 가르쳤다. 춘하엄마, 복순이 엄마 등 너댓명을 모아 야학을 연 것이다. 그런 덕분에 엄마는 겨우 자기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숫자를 익혔다. 오빠가 아버지 닮아 머리는 좋았나 보다. 그건 참 오빠가 잘 한 것 같다.


2. “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오늘도 엄마는 내게 타박을 하고 욕을 쏟아낸다.
밥을 먹는 중이었다.
“저 간나, 턱이 빠졌나, 다 흘리고 자빠졌어!”
다 먹고 그릇을 쌓아들고 부엌으로 나가려고 일어났다. 그릇이 흔들거린다.
“영숙아! 쏟겠다... 쏟겠어. 조심 안 하고, 응?”
쨍그르르, 타당탕!!
쇠그릇이 굴러 떨어지면서 방바닥에 구른다. 진짜 쏟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곱 살 여름의 일이다.
수확한 보리를 찧으러 방앗간에 가려면 몇 십리를 걸어야 한다. 가서도 한참을 기다려 찧어야 해서 엄마가 방앗간에 가는 날은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이나 되서야 돌아왔다.
엄마는 큰오빠와 보리를 싣고 방앗간으로 출발했다. 그러면 동생들 보는 건 내 일이다.
막냇동생을 업어주기도 하고 소여물을 주고 집안 잔일을 한다. 저녁이 되어가니 문득 엄마랑 큰오빠가 돌아오면 피곤하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좁쌀을 씻고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엄마는 돌아와서 밥을 해놓은 것을 보고 화색이 도는가 싶었다.
그러나 밥 먹을 때 조밥 사이로 돌덩이가 하나, 둘 끊임없이 걸리며 이를 씹어대자 욕을 하기 시작했다.
“저 간나, 가만이나 있지, 아까운 좁쌀 다 못 먹게 생겼네!”
“ 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큰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준다.
“엄마, 골라서 먹으면 되지, 얼마나 기특해요”
하고도 욕먹고! 다시는 하나봐라.  내가 좁쌀을 조리채로 일어서 돌맹이를 골라야 되는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씨!!

엄마는 오빠랑 막내 종희밖에 모른다. 쌀밥도 아들들만 주고 나랑 영자는 만날 꽁보리밥이다. 오빠가 날 때려도, 천지에 지 밖에 모르는 종희 녀석이 날 때려도 엄마는 동생이 때리면 얼마나 아프냐? 같이 싸우고 있느냐고 나만 야단을 친다.
엄마는 어떻게 딸한테 호랭이한테 물어가라고, 잡혀먹으라고 말할 수 있나? 어쩌면 친모가 아니라 계모일 것이다. 내가 진짜 호랭이한테 잡혀가면 속 시원하다 할 것 같고, 눈 깜짝도 안 할 것이다. 세상에 아들만 최고인 집, 그게 우리집이다.

3. 와야국민학교

  밭에서 잡초라도 뽑고 있을 때면  책보자기를 맨 동네 오빠가 먼지 풀풀 날리는 밭두렁을 따라 학교에 오고 갔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학교에 가고 싶어서 울고불고 엄마를 졸라 일곱 살에 입학했다. 그러나 평지도 아닌 험한 30리 길은 어린 계집아이에게 무리였다. 우겨서 들어갔지만 몇 번 못가고 포기하고 말았다.

  여덟 살에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허리에 동여매고 걸었다. 개울 지나 강을 건넜다. 엄마는 농사일과 집안일에 치어 도시락을 싸준 적이 거의 없다. 학교 가서 점심을 쫄쫄 굶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집에 오면 기진맥진했다. 학교 간다고 하면 못 가게 막진 않았지만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소풍 때라도 챙겨주면 좀 좋을까? 소풍날 아침에 보면 죽 같은 나물밥을 해 놔서 싸가지도 못했다.

그마저도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 학교에 못 가고, 일손 바쁠 땐 일 도우라고 해서 못 갔다. 자꾸 빠지니 진도를 못 따라갔다.  기초가 안 되어 있어서 수업이 어려웠다. 내 생각에 난 공부만 좀 했으면 뭐라도 됐을 건데.... 아버지 말씀처럼 선생님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동네 어느 집 부모는 장마가 지기 전에 강 건너 친구 집에 쌀을 지어다주고 친구 집에서 아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 아이는 장마 때도 학교를 빠지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그 친구가 부러웠다.

   
 

내가 태어났을 쯤 한국에는 신식 패션 바람이 불었지만 강원도 촌구석에는 그런 옷을 입는 애들이 별로 없었다. 개중에 부잣집 애들은 색깔이 들어간 스웨터를 입기도 했는데 신기하기만 했다. 난 언제나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만 입었다. 와야 국민학교 5~6학년 운동회 때 마스게임을 했다. 아이들이 줄을 맞추어 여러 동작을 하고 마지막에 넓게 퍼져서 ‘와야국민학교’를 만들었다. 운동회 준비 복장이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였다. 이때 엄마가 처음으로 시장에서 빨간 천, 노란 천을 끊어다 빨간 치마에 노란저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칙칙한 검은색이 아닌 빠알갛고 노오란 옷이 너무 좋았다. 그 뒤로 내 외출복은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후레아 치마에 블라우스를 처음 입기 시작했으니 도시 사람들보다 십년은 늦은 유행이었다.
 
  큰오빠는 결혼을 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 가서 누군가와 싸웠다가 다치게 했다는 연락이 왔
다. 올케와 엄마는 합의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내일이 와야국민한교 졸업식인데... 그래도 졸업식인데 갈 수 있겠지?
골치를 앓는 엄마에게 슬쩍 운을 뗀다.
“엄마, 나 내일 졸업식인데...”
단박에 호통이 떨어졌다.
“기집애가 졸업식은 무슨 졸업식이라, 니 오빠가 큰일이 나게 생겼는데? 그깟 게 뭐 대수라
고!
나는 더 이상 입도 뻥긋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졸업식도 못가고 사진도 찍지 못했다.

< 다음호에 계속 >

<언니네 글밭>은 2017년 여러가지연구소에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소통하고자 글 씨앗을 뿌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입니다. 작은 책으로 출판한 언니네 글밭의 글을 콩나물신문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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