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멧마루도당우물제로 이름이 바뀌어야...
멧마루 마을인 원종동에 우물제가 일 년에 두 번씩 열린다. 멧마루가 현대화되기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거행해온 마을 공동 축제이기도 하다.

▲ 현재 멧마루도당우물제 모습 (1)

조선시대 마을 축제는 우물제, 도당제, 당산제, 산신제 등 다양한 제사 형태로 거행되었다. 부천만해도 장말도당굿, 깊은구지도당제, 조마루도당제, 소새대동산신제, 춘덕산산신제 등을 제사 지내고 있다.
멧마루에서는 도당제나 당산제 보다는 우물제가 진행되었다. 멧마루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당산나무는 오정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하지만 멧마루 마을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생각해온 것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해온 우물이다. 그 우물에 대한 제사를 270여년 전부터 매년 음력 3월 1일과 7월 1일에 거행해왔다.

▲ 옛멧마루도당우물제 모습

그런데 우물제 제사의 명칭에 있어 다소 혼란스러움이 존재한다. 현재는 먼마루도당우물제로 통일되어 있다. 하지만 먼마루는 원종(遠宗)이라는 한자를 그저 우리말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멧마루라는 마을 사람들이 오랜 세월 지켜온 마을 이름이 잘못된 기록 하나로 먼마루로 정착되어 버렸다.
현재 먼마루도당우물대동제추진위원회에서 우물제를 주관해 오고 있다. 이 위원회에선 멧마루 대신 먼마루 사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멧마루가 원종 마을의 옛이름임이 틀림없는 사실이어서 잘못된 이름인 먼마루 사용을 지양하고 멧마루로 바꿔서 사용해야 옳다. 멧마루도당우물제가 정식 명칭이어야 한다.

◆ 우물의 위치
조선시대부터 마을 가운데에 있었다. 원종리 154번지였다. 현재 소사로이다. 마을 중심이었다. 오건아파트 앞 도로였다. 멧마루 마을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가 뚫리면서 우물이 사라지게 되었다.
옛우물의 형태는 오각형이었다. 이 오각형을 시멘트로 만들었다. 우물 네 군데에 기둥을 세우고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을 덮었다. 조선시대에 우물의 형태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우물제를 지낼 때는 오각형 우물에다 백설기 떡시루를 올려놓았다. 보통 마을 우물은 사각형인데 이 오각형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창덕궁 같은 궁궐의 우물은 원형이다. 궁궐의 우물은 원형으로 짓지만 일반 마을의 우물은 사각형이나 오각형으로 만든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멧마루 우물의 깊이는 약6.6m였다. 이 깊이까지 조선시대 마을 사람들이 파 내려 간 것이다. 보통 이 정도 깊이는 되어야 안정적으로 물이 나왔다. 더 깊은 우물은 15m까지 내려간 것도 있다. 멧마루 우물의 직경은 약 2m 정도였다.

▲ 옛멧마루도당우물

이 멧마루 우물이 원종동 농협에서 삼신아파트 앞에 길이 6백m 폭 30m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변 바로 옆으로 이전했다. 1994년 4월 11일 일차로 옮겨 우물형태를 보존해야 했다. 이때는 이미 수돗물이 공급되는 시절이어서 딱히 우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순전히 멧마루도당우물제를 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물의 위치는 원종 156번지였다. 오건아파트 가동 바로 앞이었다. 이 우물의 형태는 수도꼭지형으로 복원을 했다. 제대로 된 우물 형태가 아니었다. 수도꼭지형인데 우물 4군데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우물가는 울타리를 만들어 입구만 터 놓았다. 이 우물은 비좁아 마을 사람들이 우물제를 지내기에 적당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2007년도에 현재의 위치인 원종동 161-1번지로 이전을 했다. 옛우물의 형태인 오각형으로 만들었다. 우물 안쪽은 시멘트로 발라 놓아 우물형태만 복원을 한 것이다. 그 아래에 수돗물을 틀 수 있는 작은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우물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또다른 우물이다.

◆ 멧마루도당우물제의 역사
멧마루도당우물제의 역사는 무려 270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조선시대로 멧마루엔 밀양손씨, 안동김씨, 의령남씨, 인동장씨, 평산신씨, 경주최씨 등이 함께 살았다. 동네의 크기는 100여 가구로 아주 큰 마을이었다.
처음에는 집집마다 우물을 파서 사용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베르내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서해조수가 들락거렸다. 당연히 서해조수가 민물하고 섞여 있어 우물마다 짠물이 나오기 일쑤였다. 베르내로 거슬러 오르거나 방우리번덩에 들락거리는 서해조수로 인한 것이었다. 짠물이 나오는 우물물을 며칠씩 가라앉혀 사용하기도 했지만 먹기에는 늘 불편이 뒤 따랐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우물을 팠다. 마을 가운데에 판 이 우물은 사시사철 맑고 시원한 물줄기를 자랑했다. 멧마루 마을 사람들은 짠물이 나오는 집 우물 대신에 이 공동우물, 대동우물을 떠가기 위해 새벽마다 찾았다.
마을 사람들의 생명수인 도당우물이 자연스럽게 수호신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멧마루 우물이 끊기지 않게 도와주고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구하는 우물제를 열게 되었다. 우물물을 먹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들인 곡식들이며 돈을 거둬 일년에 두 번씩이나 도당우물제를 열게 되었다.
이 도당우물제 덕분에 마을은 부천에서 가장 번창한 마을이 되었고, 방우리 번덩 같은 들판 덕분에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도당우물이 사시사철 넘쳐흘렀기 때문에 우물 아래에는 미나리꽝을 만들어 마을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미나리를 재배해서 나눠 먹을 수 있었다.
 
◆ 음력 3월, 7월 열려
멧마루도당우물제는 먼저 봄에는 음력 3월 1일에 거행한다. 여름에는 음력 7월 1일 거행한다. 이 날짜는 예전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전국의 우물제는 보통 정월 초하루에 거행된다.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 아침에 마을 당산제와 더불어 우물을 푸고 우물제를 거행하는 곳이 많다.
멧마루에선 이 정원초하루에 우물제를 거행하지 않고 특별하게 농사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시켜 3월 1일 거행하고 있다. 음력 3월 1일은 농사가 시작되는 청명淸名 절기를 앞두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에도 방우리번덩을 비롯하여 멧마루 마을 앞 들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논농사며 밭농사도 왕성하게 짓고 있어서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멧마루에서도 청명 무렵부터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멧마루 사람들이 정성을 들인 것은 논농사였다. 논농사가 잘 되면 마을 전체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기에 봄에 행해진 멧마루도당우물제는 마을 사람들의 한 해 생명이 달려 있었다. 그러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음력 7월 1일은 농사철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진행했다. 농사가 풍년이면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꽃이 필 것이지만 흉년이 들면 그 웃음을 거둬졌다. 하지만 한 해 농사를 마무리 하는 마을 도당제나 마찬가지여서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물제를 지냈다.
보통 칠월 칠석날이나 백중날에 마을 사람들이 한 해 농사를 마감하는 대동놀이를 즐겼다. 백중놀이는 부천에서도 석천농기고두마리놀이로 남아 있다. 이 놀이는 장말, 솔안말, 사래이, 구지말, 서촌말 등 중상동 마을 사람들이 행하던 놀이였다.
멧마루에선 이 같은 백중놀이 대신에 멧마루도당우물제를 지냈다. 백중놀이가 호미씻기를 하면서 마을의 사람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마을 잔치라면 멧마루도당우물제도 소를 한 마리 잡아 마을 사람들이 나눠먹으며 친목을 도모하는 잔치 마당이다.

멧마루도당우물제가 면면이 이어오다가 일제강점기 때에 끊어지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일제는 멧마루 마을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꺼려했다. 전국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지내는  도당제, 당산제 등을 금지한 것처럼 우물제도 금지를 한 것이다. 일제의 가장 악랄한 문화정책이다. 여기에다 멧마루도당우물제의 가장 특별한 의식인 소를 잡아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는 성대한 의식을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우물제를 지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멧마루에는 일제의 파출소가 설치되어 있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실정탓에 대대적으로 벌이는 멧마루도당우물제는 열 수가 없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 된 뒤 2년간은 나라가 혼란한데다 대동제를 주관할 만한 사람이 없어 지내지 못했다. 이후 멧마루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단합을 해서 멧마루도당우물제를 부활시켰다. 참으로 오랜만에 거행되어진 우물제였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는 남다른 감회가 뒤따랐다.

◆ 멧마루도당우물제 제관 선정
멧마루도당우물제는 본격적인 제사에 앞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을 선정한다. 제관은 멧마루도당우물제 추진위원회에 의해 생기 있고 복덕을 갖춘 사람이 선정된다. 제관이 되기 위해서는 몸이나 가정에 부정이 없어야 한다. 각 집안에 상을 당하였거나 부인이 월경을 한다거나 하면 선정에서 제외된다. 자신이나 또는 집안사람 가운데 병환 중인 사람이 없어야 한다. 집안 식구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하거나 치료 중이면 제외되었다.
제관은 우물제의 전반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부정 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선정된다. 그러기에 절차가 아주 까다롭다. 이렇게 선정된 제관을 비롯한 제주 3명이 뽑히고, 제사를 돕는 집사(執事) 2명을 선임한다. 제사 준비를 위해 선정된 집사 둘이 마을 각호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이며 물품 등을 갹출하였다. 이때 마을 유지들은 얼마씩의 희사금을 냈다.

 

◆ 우물 청소
제관이 선정되면 멧마루도당우물제가 열리는 대동제 날 아침에 우물과 주변을 청소를 한다.  우물청소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먹는 우물이 무엇보다 청결해야 함을 말한다. 멧마루 우물은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 제일 먼저 떠서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물이었다. 첫새벽 우물물을 떠다가 정성을 다할 때 썼다.
멧마루 우물에서 첫새벽 떠온 것이 정화수井華水이다. 정화수는 도당신 같은 신들에게 바치는 매우 신성한 제물이다. 이 정화수에는 각 집안에 침투해 들어오려는 잡귀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다. 부정을 탄 곳에 재를 섞은 정화수를  뿌리면 신을 모시는 자리가 깨끗해진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기에 정화수를 떠나가 가족의 건강이나 관직에 오르는 출세 같은 것을 위해 빌고 빈다.

 마을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는 포장으로 덮어 부정이 타지 않도록 한다. 이처럼 심혈을 기울이는 신성한 존재가 바로 멧마루도당우물이다. 더욱이 우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물 청소에는 마을 장정들 10여 명이 참가한다. 우물 청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종이를 태우는 소지를 올리는데 이때 개인 소원을 빈다. 소지를 태우는 것은 개인들이 비는 소원이 하늘에 닿아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다.
무려 6미터나 되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장가는 들었으나 득남하지 못한 사람이 주로 맡는다. 이는 예전부터 우물신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보통 우물신은 용왕으로 표현되는 신이다. 하지만 여기에선 도당신의 성격도 갖고 있다. 멧마루 마을을 지켜주는 도당신이다. 지금은 우물 속이 없이 때문에 우물물을 퍼내지 않고 우물속에 있는 오물 청소만 한다. 
예전에는 도당우물 이외에 개인적으로 우물을 파면 화를 입는다고 해서 파지 않았다. 우물 청소에 필요한 물통은 큰 고무통을 잘라 만들었다. 이 통 안에 사람이 타고 우물로 들어가 우물 바닥을 청소한 후, 물을 통에 담아 주변의 미나리꽝에 버렸다. 조선시대 때는 고무통이 없을 때여서 큰 함지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 우물 주위도 깨끗이 청소하여 치성을 드렸다.

◆ 7월 초하루엔 소를 잡아
3월 초하루엔 소를 잡지 않고 소머리만 제사상에 올렸다. 반면에 7월 초하루 제사에는 소를 잡았다. 제물로 잡는 소는 제사 당일에 잡았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마을 사람들 중에서 미리 소를 잡아 한 곳에 모아 두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는 이 소고기들을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제사를 지낸 뒤 부정을 모두 물리쳐 깨끗해진 소고기를 나누는 풍습이었다. 이렇게 소를 제물로 삼는 이유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한 동물을 희생시킴으로써 풍요를 기원하는 깊은 뜻을 하늘에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멧마루 마을 각자의 집에는 소 한 마리씩을 키웠다. 아주 가난한 사람은 소를 키울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중농 정도의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소는 필수였다. 논과 밭을 갈려면 소가 쟁기질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농사 전반에 걸쳐 소는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사람 손으로만 농사를 지으려면 너무 힘들었다. 이 소중한 소를 잡는 것은 그만큼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도당신을 위하고 마을 사람들의 단결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 멧마루도당우물제에 쓰이는 제물들
멧마루도당우물제 제사에 쓰이는 제물은 소머리가 제상의 제일 가운데에 놓인다. 백설기 두 시루는 우물 위에 놓인다. 흰쌀을 놓고 그 위에 통북어를 올려놓는다. 제상 양쪽에 촛대를 세우고 촛불을 킨다. 제물 중에서 수박 한통, 포도 여러 송이, 사과, 배, 참외를 올려놓는다. 작은 상에는 향을 사르는 향로가 놓여진다. 그리고 술잔 두 개, 젓가락을 놓은 그릇, 맑은 술이 담긴 주전자, 소지 등을 놓는다. 제주는 일주일 전에 담가 사용한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현재는 우물제를 지내는 한쪽에서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하는 것은 남성이 담당한다. 떡은 백설기로 과거에는 직접 만들었다. 현재는 방앗간에 주문한다.

▲ 제상

◆ 축문 낭독
축문은 마을 노인들이 상의하여 짓는다.
원래 축문의 내용은 “정천축, 유세차 ○○년 ○월 ○일 ○시 유학 ○○생 ○○○감소고우 인명생활 유축무환 가문청정 제병양조 청정기원 금후청작 가고”이다.
현재는 “세세년년 거듭하면서 ◯◯년 3월 초하루 우리 먼마루 동네 제주 ◯◯◯는 삼가 고합니다. 이 우물은 먼마루 동 네 주민이 두루 먹는 만복 넘치는 우물입니다. 토지신과 우물신이 이제 동민을 편안하고 태평하게 하시고, 해마 다 풍작을 들게 하여 병과 재앙이 없게 하여 주시길 간절 히 고하나이다. 삼가 맑은 술과 쇠고기를 정성 들여 바치오니 신께서 마음껏 드시옵소서”이다.

▲ 현재 멧마루도당우물제 모습 (2)

제관이 축문을 낭독할 때는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경건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경청하고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한다. 현재는 우물 앞에 차양이 쳐지고 의자가 놓여져 있다. 이곳에 마을 사람들이 착석하고, 부천내 타지역 사람들도 초청되어 앉는다.   
축문을 낭독한 후 제관이 먼저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소지를 올리면 이어 지역 유지들이 소지를 올린다. 이때 마을 부녀자들이 함께 기원하면서 치성을 드린다. 소지가 끝나면 잡은 쇠고기국을 끓여서 동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먹으면서 피로도 풀고, 그 동안의 농사 작황 및 덕담을 주고받는다.

◆ 멧마루도당우물제 제사 끝
제사 음복이 끝나면 새끼를 꼬아 쇠고기를 마을 가구 수에 맞추어 나눈다. 가정이 넉넉한 집안은 8근 정도에 해당하는 한 메를 가져간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두 집 내지 몇 집이 함께 한 메를 가져간다. 이때는 출가했거나 고향을 떠났던 사람도 찾아와서 쇠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쇠고기를 나눈 후 마을 사람들이 수숫대에 호주의 이름을 적은 뒤 도당우물 주변에 있는 미나리꽝에 꽂아 놓고 개인별 구역을 나눈 뒤 미나리를 심어서 수확했다. 요즘은 도시화로 미나리꽝이 사라져 미나리를 심는 풍습도 사라졌다.
                                                  참고 : 디지털부천문화대전(한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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