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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골에 밀양변씨 향나무,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가 있다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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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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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골 향나무.
향나무는 밀양변씨 종가집에서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서 있다.  아주 큰 향나무지지만 오른쪽에만 잎들이 조금 살아있고 나머지는 죽은 가지를 달고 있다.  지금은 밀양변씨 제실인 흑량제(黑梁祭)의 뒤쪽 담안에 가두어 놓았다.
향나무 아래는 많이 패여 있다.  밀양변씨 집안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기 위해 쪼개다 써서 그렇게 되었다.

   
▲ 강상골 밀양변씨 제실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 주인공인 변종인이 강상골에 살 때 심었다고 전해져 오는 향나무이다. 변종인이 태어난 해가 1433년도이니까 2019년을 기준으로 무려 586년이다. 어린 묘목을 심었다면 몇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렇지만 나무 형태나 크기로 봐서 그렇게 나이를 먹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더 먹어 보인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나이를 측정해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있다.

강상골 향나무 나이가 오백년이 넘었다고들 하지만 그 나이가 정확하게 몇 살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언덕배기에 있는 향나무로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집안에 들어있기에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을 거란 믿음이 든다. 
향나무 주변에 황매화가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향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황매화가 노랗게 꽃을 피우는 것은 아름답지만 향나무는 정말 소중한 나무여서 보호해야 하는데, 오히려 향나무를 죽이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 된다. 지금도 이 황매화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바로 옆에 있던 느티나무는 향나무 관리를 위해 베어졌다.

향나무는 제사를 지낼 때 향목으로 아주 요긴한 나무였다. 특히 종가집 집안에서는 일년에 여러 번에 달하는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낼 때마다 향나무에서 향목을 깎아 써야 했으므로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향나무 아래에는 오랜 시절 향나무를 깎아 향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한쪽이 상처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삶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보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강상골 향나무는 높이가 약 8미터 정도 된다. 둘레는 1.5미터이다. 향목으로 쓰여지지 않았다면 둘레는 지금 보다 더 두꺼워 졌을 것이다. 향목으로 쓰는 바람에 둘레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 강상골 향나무

향나무의 향(香)은 ‘향기 향(香)’이라고 해서 한자이다. 글자에서 보여주듯이 ‘ 향기를 내는 나무’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이 향나무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양반집이나 서당, 향교, 궁궐에는 어김없이 향나무를 심었다.

우리 민족은 제사를 지낼 때는 항상 향나무로 만든 나무 조각을 태워 향불을 피웠다. 지금은 제조된 향을 피운다.  그 민간 풍습이 단군 이래로 끊기지 않고 전해온 것이다.  향나무로 향불을 피우는 풍습 말이다.
단군 할아버지가 향불을 피운 향나무를 단향목(檀香木)이라고 하고 자단(紫檀)이라고도 한다. 자주빛 자(紫)에 박달나무 단(檀)으로 향나무 나무 색깔이 갈색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진단(眞檀)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향나무를 표기하는 한자가 여럿이다.

향나무는 궁중이나 이런 곳에서는 침향목이라고 해서 열대지방에 나는 목재를 수입해서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향나무에서 나는 향을 원료로 채취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향나무는 측백나무하고는 그 형태가 달라서 쉽게 구별이 가능했다. 측백나무는 잎사귀가 넓게 퍼져 있는 반면에 향나무는 끝이 날카로운 바늘잎이 대부분이며 손바닥에 가시가 박힐 정도로 단단하다.  그런데 향나무가 나이를 10년 정도 더 먹으면 바늘잎 이외에 찌르지 않는 비늘잎이 함께 생겨나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향나무 은행나무처럼 암수 딴그루 나무이다. 암그루만 있으면 꽃을 피우지 못한다. 반드시 수그루가 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된다. 꽃은 봄에 핀다. 이 꽃이 수정을 해서 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굵은 콩알만하고 둥글다. 얼핏보면 매끈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비늘이 서로 맞붙어 있다.

강상골 향나무는 한 그루 밖에 없으니까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철 잎만 푸르게 푸르게 장식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향나무라고 이야기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우리나라 궁궐인 창덕궁에도 오래된 향나무가 있고 전라도 송광사에도 곱향나무가 있다. 곱향나무라고 해서 일반 향나무하고는 그 종류가 조금 다르다. 서울 용두동에도 아주 오래된 향나무가 있고 전국 여기저기 오래되어 나이를 많이 먹은 향나무가 부지기수다.
일반 향나무가 있고, 옆으로 누워서 자라는 눈향나무가 있다. 수주 변영로 시비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향나무가 바로 눈향나무이다. 눈향나무는 한라산이나 지리산, 그리고 소백산이나 설악산 같은 산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땅을 아예 기어가는 향나무를 섬향나무라고 한다. 집 우물가에 주로 심는 뚝향나무가 있다. 요즘에는 날카로운 바늘잎이 아예 처음부터 생기지 않고 비늘잎만 생기게 개량한 가이스까향나무가 있다. 이 개량종이 학교나 관공서에 대부분 심어져 있다. 우리말로는 나사백이라고 한다.

● 공장공 변종인(卞宗仁) 신도비  
강상골 언덕을 오르면 밀양변씨 집안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묘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밀양변씨 선산이다.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각이 보인다. 신도비가 비 맞고 눈 맞고 하면 신도비가 자체가 상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세운 것이다.  
옛날에는 이 비각건물이 없었다. 신도비만 덜렁 서 있었는데 공장공 변종인 후손들이 지난 1996년도에 서둘러 세운 거다.

   
▲ 변종인신도비각

신도비神道碑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아무나 세우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벼슬을 가진 사람만이 세울 수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이 기준이 점점 사라져가 양반이면 너도나도 세웠다. 종2품 이하의 사람들은 신도비를 세우려고 해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 조선시대 양반의 특권이었다. 
조선시대 관직은 정(正)이 1품에서 9품까지 있고, 종(從)도 1품에서 9품까지 있었다. 모두 합하면 18개 직급이다. 이는 조선시대 관직을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품계를 만들어 놓은 거다. 사실, 조선시대 때는 문관을 무관보다 더 우대했다. 덕분에 무관은 지방관으로 떠돌아야 하는 설음을 맛보았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곳에서는 품계석 동쪽에 서면 문관이고, 서쪽에 서면 무관으로 구분을 했다. 동쪽에서 해가 뜨는데 문관은 해가 뜨는 것에 비유하고, 서쪽은 해가 지는데 무관을 그렇게 구분해 놓은 거다. 종3품 이상을 당상관이라고 한다. 이들은 문관이나 무관 구분없이 다 똑같이 품계를 주었다. 그런데 정(正)이 종(從)보다는 서열상 우위에 있다. 정1품은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으로 삼정승으로 종1품인 좌찬성, 우찬성 보다 우위에 있는 거다.
공장공 변종인이 마지막 벼슬은 공조판서였다. 정2품에 해당한다. 원래 무인이었지만 당상관 이상에서는 문관, 무관 따지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 그러니까 문관 벼슬을 한 거다. 덕분에 신도비를 세울 자격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신도비각은 팔작지붕이 있고, 지붕 아래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공장공신도비각(恭莊公神道碑閣)’ 
보통 신도비는 묘에서 바라보았을 때 주로 동남쪽 방향에 세웠다. 이는 선친이 죽어 ‘혼령이 다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신도(神道)는 풍수지리학에서 동남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도비각 옆에는 변종인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이 설명판에는 ‘일을 조심스럽게 하고 임금 섬기기를 공손히 하여 공(恭)이고, 적을 이기고 뜻이 강하였으므로 장(莊)’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 강상골 변종인 신도비

변종인은 1433년도에 고리울 강상골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부모가 생존해 있지 않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변종인은 부모를 여읜 그 아픔을 딛고 열심히 마을 뒷산을 오르며 무예를 갈고 닦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19살 때 당시 수도인 한양을 지키던 오위의 하나인 충순위(忠順衛)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 뒤 임금이 기거하는 궁궐을 수비하는 내금위(內禁衛)에서 궁궐 출입문을 지키기도 했다. 
내금위는 세종 때부터는 5품 이하의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뽑았다. 지략이 뛰어나고 용모가 단정하며 키가 큰 자를 뽑아 조직하였다. 그러고 보면 공장공 변종인은 키가 아주 컸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내금위에 소속되면 교대 근무가 없는 장번군사(長番軍士)로 조선시대 여러 군대 가운데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렇게 궁궐을 지키면서 변종인은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비록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지는 않았더라도 군주가 명하면 힘써 나가 싸워야 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했다. 애국심이 투철한 군인이었다.

이렇게 군대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무예를 닦아 1460년 27살에 무과에 급제를 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32살에 과거 급제를 했으니까 5살 먼저 한 셈이었다.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살이를 하던 7년 뒤인 1467년도에 이시애난이 터졌다. 당시 약관의 나이에 장군이 된 남이장군과 더불어 이시애난에 투입되어 아주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벼슬도 올라 종3품의 품계인 당상관이 되었다.
그 뒤로 남해현령이 되었다. 남해는 경상도에 있는 작은 현이었다. 후에 이순신 장군도 남해현령을 지냈다. 그 뒤에 만포첨사를 했는데 이 만포는 두만강 아주 북쪽에 있는 곳이었다. 첨사는 300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었다. 나중에 이순신 장군도 이 만포에서 첨사를 했다. 그 다음 벼슬은 첨지중추원사였다.

나이 40세인 1474년도 12월 강계 근천에 웅거하던 여진족이 3천여 기병을 동원하여 난리를 일으키자 평안도 조전장으로서 참전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포상으로 담비 가죽으로 된 도포 한 벌을 하사받았다.
그 다음해에는 이산군수가 된 후 가선대부를 더하고 창주에서 군공을 추가하여 상을 받았다. 1477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근무를 하다가 다음 해인 1478년도에는 함경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도호부 부사가 되었다. 온성부사 재직시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려 어진 수령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오랑캐들에 대해서는 위엄으로 대처하여 거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481년 공조참판이 된 변종인은 그 해 당시 전세 등 현물 미곡을 서울로 운송하는 조운 중 전라도 군산의 경우 바다 입구가 멀고 수로가 험하여 배가 다니기에 불편하므로 군산노인성창을 바로 해구로 통하게 하여 배가 다니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세 수납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영안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마절도사는 병영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병사들을 훈련하거나 군사들을 통솔하는 직책이었다. 영안북도는 함경북도로 만주와 접하는 곳이어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었다. 이때 여진족 같은 오랑캐 침입을 방어하지 못하고 태만하였다는 이유로 장형에 처해져 변방으로 충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변종인의 일생에서 오점이라면 오점이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3년 성종 2년에 창설된 경연에 참진하는 직무를 맡아보던 정3품 이상이 임명된 문관직인 특진관이 되어 진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9월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가 다음 달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4년 12월에 명나라로 정월 초하루날에 축하하러 가는 사신인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정조사로 갔을 때 북녘의 오랑캐가 조선인을 능욕하자 화복으로 회유하여 사항을 조목조목 열거 설명하여 이해를 시키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임금에 오른 이후에는 정조사, 평안도 절도사, 경상북도 수군절도사,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그 뒤에 1498년 나이 65세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공조판서는 정2품으로 산림이나 집짓는 것, 대장간에서 쇠를 다루는 일, 궁궐을 짓는 일 등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삼정승 밑에 있는 6판서 중에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1499년 66세에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국을 돌면서 군사를 독려하는 순변사로 함경남도에서 변방을 구축하다가 과로로 풍질이 생겨 사망하게 되었다. 순변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파견된 특사로 지방민들의 생활상이나 농사가 잘되고 못되는 형편 등을 살피는 특별한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변종인 신도비의 머리부분을 옥개(屋蓋)라고 한다. 이 옥개의 모양이 투구가 아니라 연꽃으로 되어 있다. 투구모양이라고 하면 양옆이 투구처럼 둘둘 말려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없다. 칼을 들고 싸우는 무관이라고 해도 신도비에는 하엽형(荷葉形)이라고 해서 연꽃을 형상화해서 음각한 것을 썼다. 이를 화관석(花冠石)이라고도 부른다. 연꽃무늬 모양의 돌을 가리키는 거야. 그리고 신도비의 받침대인 비좌(碑座)는 문갑(文匣) 무늬로 되어 있다.

   
▲ 변종인신도비옥개문양
   
▲ 변종인신도비문갑문양

문갑(文匣)은 예전에 책을 꽂아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책을 책꽂이에 꽂아두기 보다는 문갑속에 넣어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이 문갑 형태로 한 무늬를 가리켜 문갑무늬라고 한다.
신도비 뒷면에는 변종인의 일생이 새겨져 있다. 마모가 되어 읽기 힘들다. 비문은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인 성현 선생이 지었다. 조선시대 용재총화(慵齋叢話)라고 조선시대 정치, 사회, 문화를 살피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집을 편찬하기도 한 분이다.
 

원래 변종인 신도비는 고강동복지회관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변종인 묘지도 거기에 있었고 신도비도 거기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변종인의 신도비가 세워진 직후부터 고리울 일대에 원인모를 불이 자주 났다. 자주 불이 나고 좋지 않은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자 주민들이 불안에 떨었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이 의견을 내서 신도비를 옮기자고 했다. 
그래서 현재의 자리로 변종인의 묘역을 조성하고 신도비를 옮기자 고리울 일대에서 일어났던 화재가 멎고 안 좋은 일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 신도비의 높이는 155.5센티미터에 이르고 폭이 75.5센티미터이다. 신도비 두께는 20센티미터이다. 이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가 1986년 4월 29일자로 부천시에서 부천시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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