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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향토 유적 제2호인 한언 묘표에 다녀오다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  hansa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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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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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로 도배된 계수동 일대
범박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단지는 뒤에 할미산을 배경으로 지어진 것이다. 자연녹지를 끼고 있어서 전원아파트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현대 홈타운은 삼태봉이라는 산을 하나 잡아 먹었다.
할미산 아래에 봉긋하게 솟아 있던 삼태봉을 잡아먹고 자연을 도려낸 뒤 아파트들을 토해 놓았다. 삼태봉이라는 산은 삼신할미가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아들딸을 점지해주는 중요한 산이름이다. 사람들이 삼태봉을 깔고 앉아서 삼신할미는 어디로 가서 살까?
범박동 현대홈타운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계수동이다. 계수동에는 오른쪽으로 포도밭이 있고 왼편으로는 함박산이 있다. 이 함박산이 현재는 절반쯤 깎여 나가 산이라고 이름붙이기도 난감하게 되었다. 여기에도 부천옥길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초대규모인 이마트옥길점이 건설 중에 있다. 부천에 작은 산이든 조금 큰 산이든 무조건 깎아내고 아파트를 짓었다. 부천의 녹지는 어디에서 새롭게 찾아질 수 있나? 
부천에 남아 있던 얼마되지 않은 포도밭도 부천옥길호반베르디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이름도 어렵고 계수동이라는 토박이 이름도 사라져 그저 옥길동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들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이 계수동의 역사를 알까?

● 청평군 한언 묘표를 찾아서
청평군 한언 묘표(墓標)를 찾아 나섰다. 원래는 입구에 공장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입구에 청평군 한언 묘표를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부천문화원에서 세워놓은 팻말이었다. 지금은 이 일대는 깨끗하게 깎고 밀어내서 이런 팻말은 온데간데  없다. 
입구 공장을 지나 왼편에 가정집이 보였다 그 가정집을 끼고 왼편으로 꺾어 돌았다. 오른편 밭에는 부천을 상징하는 복숭아밭이 있었다. 이들 복숭아밭도 깎여져 사라져 버렸다. 대신 이 일대에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이름하여 산들역사 문화공원이다. 왜 ‘산들’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문화공원이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산 건너편에 자리잡은 옥길산들초등학교 명칭에도 산들이 붙었다. 참으로 고약하다. 엄연하게 한박산이라는 땅이름이 있고, 청평군 한언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산들이라니... 참으로 어쩌구니가 없다. 그저 문화라는 말이 좋아 건설업자나 부천시 공무원들의 합작품일 듯 싶다.
한언 묘표가 있는 곳까지 바닥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넓적한 바닥돌이 깔려 있었다. 이곳도 새롭게 조성되어 있다. 복숭아밭이 사라져 뭔가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다.

   
▲ 비각이 없던 상태에서 한언묘표

청평군 한언 묘표가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예전에는 비각이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그만 묘표가 서 있었다. 그 묘표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쇠파이프를 박아놓았다. 그 쇠파이프를 쇠줄로 연결해서 막아놓았다. 지금은 한언묘표가 비바람에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각을 세워 놓았다. 일종의 보호각이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한언 묘표(墓標)는 우리나라 제품이 아니란 사

실이다. 중국에서 물 건너 가져온 것이다. 중국산임에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과 비슷하다. 청평군 한언이 45세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기에 돌아가셨다. 그때 한언의 유해를 임전이라는 분이 모셔오면서 이 묘표도 함께 가지고 온 거다. 임전은 조선시대 중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문인이자 경학(經學)에 밝은 학자였다. 당시 조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임진왜란 때 쓴 시 1편이 전해진다. 문집으로 명고집(鳴皐集)이 전한다.

   
▲ 한언묘표 비각

● 한언 묘표의 모습
묘표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묘표 위쪽에 이수(螭首)가 조각되어 있다. 이 이수는 뿔 없는 용이라는 뜻이다. 용에는 당연히 당당한 뿔이 있는데 이 이수는 뿔이 없어서 교룡(蛟龍)이라고도 한다. 다른 말로는 용은 뿔이 달려 있는데 뿔이 없으니까 이무기라고도 한다.
이 이수가 묘비의 위쪽에 조각된 것은 당나라 때이다. 이후 지금 같은  이수와 비신, 방부(方趺)·귀부(龜趺)를 가진 석비양식이나 수법의 기본형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고려에 전해져 우리나라 묘비의 기본양식이 되었다.
한언묘표의 모습은 이수가 구름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구름을 감고 승천하는 모습하고 비슷하다. 언젠가는 묘표의 주인공인 한언이 깨어나 용으로 승천했으면 하는 후손들의 바람이 새겨져 있다고 할까?
한언 묘표는 맨아랫쪽을 기단부, 비좌라고 하고 묘표의 몸체를 비신이라고 한다. 
비의 몸인 비신에는 청평군한공지묘(淸平君韓公之墓)라고 뚜렷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청주한씨문열공파보(淸州韓氏文烈公派譜)’에도 ‘가선대부이조참판청평군한언묘표음기(嘉善大夫吏曹參判淸平君韓堰墓表陰記)’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이 비가 신도비가 아니라 한언의 묘임을 나타내주는 묘표(墓標)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 한언신도비라고 잘못 설명된 설명판

그런데 이 한언 묘표를 신도비로 잘못 해석해서 여러 자료에 수록해 놓았다. 두산백과에는 묘표(墓表)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타당성을 얻고 있다고 하면서도 한언신도비라는 제목을 달았다. 네이버 지도에도 한언신도비로 표기해 놓고 있다. 다음 지도에는 표기조차 해놓고 있지 않다. 예전 안내 표지판에도 한언신도비라고 했다. 두산백과 등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할 의무가 부천시에 있다. 그런데 부천시는 손, 발, 머리까지 다 놓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묘표(墓標)란 묘지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주는 비석을 말한다. 이 묘표의 역사는 공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孔子)가 은(殷)나라 비간(比干)과 오나라 계찰(季札)의 묘비 글씨를 직접 써서 그들의 덕행을 기리고,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한 사실에서 연유했다.
보통 묘 앞에 세워지는 비는 묘표(墓表), 묘갈(墓碣),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묘표는 돌아가신 분의 신분만 간단히 기록해서 세운 어찌보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비석이다. 후손들이 성묘 때마다 묘표에 새겨진 인물을 잊지 않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묘표를 세운 가장 큰 목적이다. 묘표 앞면에는 누구 묘인지 신원을 썼다. 청평군한공지묘(淸平君韓公之墓)가 그 증거이다. 뒷면에는 묘표가 건립된 그 연대를 새겼다. 묘의 주인의 생전 행적이 뚜렷하면 일정한 격식을 갖춰 신도비처럼 돌아가신 분의 생애를 약술(略述)하기도 했다. 이를 ‘묘표음기墓表陰記’라 했다. 한언묘표는 마모가 되어 읽을 수가 없다. 묘표에는 신도비처럼 상세하게 생애를 상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한언의 묘표음기가 남아 있는 것은 한언의 간단한 일대기를 기록했음을 증명한다.

   
▲ 한언 묘표

● 한언은 어떤 사람인가?
청평군 한언은 조선시대 세조 때 시대를 휘어잡았던 한명회(韓明澮)의 동생인 한명진의 아들이다. 한명회는 세조의 오른팔로 세조의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역사의 물줄기를 비틀어놓아 조선시대 내내 왕조의 정통성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한명회가 한언의 큰아버지인 백부(伯父)이다. 한명회의 작은 집 조카이다. 왕위찬탈을 통해 권력을 잡은 당대로 보면 대단한 실세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언도 그 음덕을 입어 관직도 승승장구했다.
한언은 1448년도에 태어났다. 그후 1474년, 성종 5년인데 그때 나이 26살에 대사성이 되었다. 1475년 27살에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형조참의 겸 부총관이 되었다. 대단히 빠른 출세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 이조참의, 대사간, 대사헌,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492년 중년의 나이인 45세에 감은사로 명에 갔다.
1492년 9월 2일에 질병으로 베이징 회동관(會同館)에서 돌아가셨다.  명의 황제가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벽(林壁)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관리를 보내어 호송하여 주었다. 한언의 아들인 한홍윤(韓弘潤)이 사자로 가서 관을 모시고 돌아왔다. 한언의 부음 소식이 알려지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며 의식대로 조제(弔祭)를 하라고 명하고, 특별히 인부를 보내어 장사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이해 11월 29일에 함박산의 당시 주소인 인천부(仁川府) 동면(東面) 황천리(黃川里) 계좌 정향(癸坐丁向) 터에 안장하였다.
한언이 역임한 관직에서 대사헌은 현재의 감사원장 직책이다. 당시에 권력에 줄을 대는 청탁을 받아주지 않는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사실 청백리(淸白吏)라는 호칭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 청평군 한언의 묘역
대사헌 한언의 묘역에 올랐다. 부부묘이다. 한언하고 그 부인이 곁에  묻혔다. 묘역에서 묘를 바라보고 서면 왼쪽이 한언의 묘이고, 오른쪽이 밀양박씨 한언 부인의 묘이다. 명절 때 세배할 때는 남자가 오른쪽에 앉고, 여자는 왼쪽에 앉아 자식들의 절을 받는다. 사후에는 반대가 되어 묘를 조성한다.

   
▲ 한언의 묘역

 한언의 묘 앞에는 네모 반듯하게 깎아 놓은 돌이 있다. 이를 상석이라고 한다. 청주한씨 이양공파 시앙제 같은 제사를 지낼 때 여기에 음식을 차려 놓는다. 부천 청주한씨 이양공파 종친회에서 매년 시앙제를 지낸다. 그럴 때면 여기 상석에 제물을 가득 진열해 놓는다. 그리고 그 밑에 작은 돌은 향로석이라고 하고 여기에 향을 피운다. 향을 피우는 이유는 하늘에 올라간 혼을 불러 오기 위함이다. 한언의 혼이 하늘에 안착해 있는데 향을 피우면 향내를 맡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향로석 앞에 있는 석물은 장명등(長明燈)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때는 장명등의 경우는 1품 재상(一品宰相)에 한하여 세울 수 있도록 한정하였다. 장명등이 세워진 곳엔 온갖 사악한 기운이 묘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벽사역할까지 담당한다.
한언의 최종 벼슬은 대사헌으로 종2품이다. 전국에 1품 재상이 아닌데도 장명등이 세워진 곳이 많다. 아마도 당대 권세에 따라 이것도 오르락내리락 한 것 같다. 나라에서 세우도록 허락했다면 이 장명등이 세워진 곳에는 등불이 비치는 곳까지 나라에서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권세가 대단한거다. 이 장명등에 불을 키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기도 했다. 시묘살이라는 것은 묘옆에 초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고 음식을 대접한 것을 말한다. 경기도 여주 세중옛돌박물관에 가면 장명등이 정말 많이 전시되어 있다. 주인잃은 장명등이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하게 관리했지만 도시개발 등으로 주인잃은 장명등들이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이다.

   
▲ 한언 묘역에 세워진 문인석

그 다음 무덤을 지키는 망주석(望柱石)을 만났다. 망주석 옆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한언 묘역의 문인석은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양손은 앞쪽으로 끼고 있는 모습이 어째 중국 사람들이 옷 입고 다니면서 인사할 때나 추울 때 두손을 옷소매 안으로 넣은 모습 같다.
중국에서 가져온 문인석이다. 무덤 양켠에 하나씩 서 있다. 우리나라 여러 무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아주 재미있는 것은 문인석상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 한언 묘역의 문인석상은 당시 명나라 때 관인들이 입었던 관복과는 거리가 멀다. 명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관인들은 이 차림이 아니다. 이 문인석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머리에 쓰고 있는 관모나 소매의 폭이 아주 좁은 것으로 미뤄 보아 당시 중국 변방에서 유래한 옷차림 같다. 이 문인석상을 중국에서 가져올 때 아마도 중국 변방에서 만들어진 문인석상을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 한언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함박산
이 한언의 묘역을 자그마한 산들이 둘러 싸 안았다. 예전 한언 묘역 주위는 마치 연꽃에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명당을 가리켜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아파트 개발로 인해 산언덕을 깎아 버려서 연화부수형은 커녕 평지가 되어 버렸다.
한언 묘역이 자리 잡은 산은 함박산이다. 계수동 사람들은 한기산이라고 부른다. 청주 한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해서 한기(韓基)라고 한 것이다.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함박산이 맞다. 이렇게 땅이름이 권세가, 즉 양반들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리기 일쑤였다.
여기서 함박산에서 그 뜻은 ‘함’은 ‘한’으로 ‘크다’는 우리 고유의 말이고, 박은 ‘밝다’는 의미의 말이다. 한밝뫼, 한밝메이다. 그러니까 아주 크고 밝게 빛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큰 산은 아니다. 옛사람들의 과장법이 섞여 있다고 봐야겠다. 옛날에는 해가 동쪽에서 뜨니까 해뜨는 곳을 아주 중요시 했다. 크고 밝은 해가 뜨는 산이라는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전국에 함박산이 참 많다. 함백산도 똑 같다.
한언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살펴보니 여기 저기 다른 무덤들이 있었다. 중국에까지 가서 한언의 시신을 모시고 온 효자 아들인 한홍윤도 있었다. 한홍윤 묘에도 상석이며 문인석, 망주석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밖에도 한언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함박산은 청주한씨 이양공파의 종중산이다. 부천 향토 유적 제2호 지정된 게 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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