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새해 들어 가장 핫한 도시로 떠오른 전라남도 목포를 찾았다. 목포가 고향은 아니라도 스무살 청년 시절 목포역에 집결해 입영열차를 탔던 인연으로 목포는 내게 남다른 도시다. 그 목포가 갑자기 때 아닌 투기 의혹으로 들썩이고 있으니 목포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으랴?

▲ 목포역 전경. 1913년 목포-학교간 운행이 시작되면서, 보통역으로 개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산역에서 아침 7시 19분 발 무궁화열차를 타고 5시간을 달린 끝에, 임성리역을 지나 호남선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자 마침내 목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목포역 광장에 서니 저 앞에 유달산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서있다. 금방이라도, “오매, 내 새끼 왔능가!” 하며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만 같은, 아! 유달산은 내게 고향집,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목포역을 나서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목포문화원에 들렀다. 목포문화원은 등록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이다. 호남은행은 현준호가 설립한 순수 민족계 은행으로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건립연도는 1926년이다. 근대개항도시 목포에 남아있는 유일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로 순수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참고로 등록문화재란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가치가 커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를 말하며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의 기간에 건설·제작·형성된 건조물, 시설물, 문학예술작품, 생활문화자산, 산업과학기술분야, 동산문화재, 역사유적 등이 주 대상이다. 등록 주체는 문화재청장이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 목포문화원 전경. 등록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이다.

목포는 근대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건축 도시일 뿐 아니라 금세기 한국문화예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한 문화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난영, 박화성, 김우진, 차범석, 이매방, 남농 허건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의 흔적이 즐비하다.  단일 도시로는 가장 많은 예술원 회원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문화원을 나서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리 봐도 목포가 살길은 문화, 예술 밖에는 없다. 서울에서 KTX로 불과 두 시간 반 거리이고, 또 목포역에서 근대역사문화공간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니, 이 일대를 문학과 음악, 미술, 무용, 건축, 공예 등이 어우러진 복합문화타운으로 조성한다면 목포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우물안 개구리의 짧은 소견일 뿐이다.

▲ 갑자옥 모자점. 1924년 문을 연 모자 전문점으로 현재의 건물은 1965년 화재로 소실된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을 헐어내고 지은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갑자옥 모자점, 창성장(정확히는 간판만 봄) 등을 돌아보고 유명한 영란횟집 뒤쪽으로 난 좁은 비탈길을 오르자 아무리 낙후된 도시라도 그렇지 시내 한 복판에 이런 집들이 있나 할 정도로 작고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빈집도 많이 눈에 띄고 더러는 무너진 채 방치된 집도 보인다. 좁은 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정상에 오르니 곧 목포진역사공원이다. 목포진(木浦鎭)은 1439년(세종 21년)에 처음 설치가 결정되었으며, 성의 모습을 갖춘 것은 연산군 때이고, 이후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기지로 역할을 다했으나 1895년(고종 32년), 고종 칙령 141호에 의거 폐진 되었다. 폐진 된 후에는 유적비만 남아있던 것을 지난 2014년 일부 복원했다.

▲ 목포진 역사공원으로 오르는 골목길. 장상까지 미로처럼 좁은 길이 이어진다.

힘차게 바람에 나부끼는 목포진, 전라좌수영 등의 깃발이 목포의 옛 영화를 말해주는 듯한데, 문득 발아래 굽어보는 만호동 일대의 시가지는 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온다. 최근 들어 갑자기 투기 논란이 일고 있지만 내게는 오랫동안 투기(投棄), 즉 버려진 지역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낡고 초라한 건물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참으로 난감할 따름인데 이 버려진 땅을 살려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투기의 프레임을 씌워 윽박지르는 것은 그야말로 어렵게 틔운 싹을 무참히 밟아버리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단기간의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기꾼이 있다면 이는 철저히 차단해야겠지만, 10년, 20년 후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바라본 창성장 주변. 사진 중앙의 빨간색 건물이 창성장이다.

목포진역사공원을 내려와 근대역사관으로 향하면서 보니 좌우의 집들이 넓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도로도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어 바로 옆의 만호동과는 천차만별이다. 뒤로는 유달산을 등지고 있고 앞으로는 목포항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터인데다 남향이라 한겨울임에도 봄날처럼 날씨가 포근하다. 알고보니 1897년 개항이후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조계지(租界地)라고 한다.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악명 높은 수탈기관의 건물들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인가 하였다. 이훈동정원, 성옥기념관, 목포공립심상소학교강당(지금의 유달초등학교) 등을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고하도 너머 화원반도로 떨어진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금덩어리라도 떨어지면 이곳 유달산 자락에 집 한 간을 마련하여 고하도의 눈 덮인 소나무와 삼학도의 맑은 아지랑이를 벗 삼아 유유자적해봄직도 하건만, 떨어지라는 금덩어리는 안 떨어지고 멀리 달성사의 저녁 종소리만 귓전에 떨어지니 어느덧 발걸음은 총총, 노적봉 너머 목원동 숙소로 향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 목포근대역사관본관. 조선 광무4년(1900)에 건립되어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914년부터 목포부청사,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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