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게시판에 해마다 명절 전후에 올라온다는 문구다. 그 이유가 제사 때문에 여성의 희생과 부부싸움이 원인이라고 한다. 제사로 인하여 가족의 갈등을 조장하고 이혼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전래로 설날은 새해의 시작을 알리고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의식이고 그 의례를 통하여 흩어진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민속 전래의 연례행사다.

물론 가족 간의 약속으로 어떤 하루를 정하여 미리 모여 의례를 마치고, 연휴인 명절 연휴를 여행 등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일 수 없다면 여러 방법을 이용하여 의례를 치르기도 한다. 제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기념일이라면 생일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기념일을 정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각별한 민족성과 문화가 있다.

제사의 본래 의미가 과연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만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하지 않아도 알고, 그 자체를 묻는 것은 비루한 우문(愚問)이다. 부모와 나의 관계는 선택이 아닌 천륜(天倫)이다. 부모의 부모와 나와 내 자식과 자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가족 관계는 결속을 전제로 하는 혈연적으로 공동체를 초월하는 각별한 인연이다.

제사가 가족관계를 와해시키는 주범으로 변하여 제사를 없애달라는 청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청와대가 제사를 없애줄 수 있다거나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수는 과연 어떤 심사(心思)일까. 제사 때문에 이혼할 수 있는 관계라면 굳이 제사를 핑계로 공개적 청원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해의 시작과 제사를 통해 조상을 추상하고 한데 모여 가족애를 나누는 의례가 가혹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라면 그 가족은 이미 붕괴를 배태한 위험한 관계는 아닐까.

국민 청원은 지금의 세태를 반영하는 바로메타이다. 제사가 매우 내밀한 소공동체인 가족 간의 결속의 의미를 지닌 의례이고 의식이라면 지금은 인성의 도를 넘어가는 과도한 시대는 아닐까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안타까움이 깊다. 아주 많이 안타깝다. 형제간에 다투다가도 아버지의 기침소리에 다툼을 멈추던 옛 시절은 아스라한 추억의 아름다움이고, 기억으로 남은 어린 시절이 지금은 웃음을 선사하는 시간의 긍정적인 소중한 흔적이다.

조상에 대한 정성의 표징이 제사였고, 그 정성을 효도라고 설파했던 옛 성현들은 과연 ‘지금’을 상상이나 했을까. 부모가 나를 세상에 보냈기에 우리 모두는 돌아가야만 한다. 부모의 부모도 그랬듯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시대가 아직은 아니다. 상상 속에서라도 말이다. 그런 상상의 현실화가 가능한 시대가 되면 당연히 제사도 없어질 것이다.

종교의 영향만은 아닌 지금의 제사 소멸 요구는 조상을 우상화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제물에 대한 노동 때문도 아닐 것이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국립묘지에 유골로 잠들어 계신다. 내게는 죄 지은 같아 늘 불편하다. 그래서 늘 아버지는 엄한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무시고 나를 채근하신다. 그러나 내게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가는 길에 등대이시고 신호등이시며 파수꾼이시고 세파를 견디기 위한 버팀목이 되신다. 언제나 불효에 대한 반성의 골이 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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