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준 신도비

계수동 함박산 기슭에 조성된 청주한씨 묘역에 부천 향토유적 제3호인 한준신도비가 한언 묘표와 더불어 새롭게 조성되어 있다. 원래는 한언묘표, 한준신도비, 한언묘역, 한준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옥길지구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할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조성된 것이다. 이에 한준신도비에 새겨진 신도비문을 소개한다. 비문 중간에 나오는 관직 같은 경우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가지 설명을 붙였다.(편집자 주)

▲ 한준신도비 설명판

 
 우참찬청천군한공신도비명

공(公)의 휘(諱)는 준(準)이고, 자(字)는 공칙(公則)이며, 별호(別號)는 남강(南岡)이다. 성(姓)은 한씨(韓氏)이며, 본관은 청주 상당(上黨)에서 살았다. 청주 한씨는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기자씨(箕子氏)가 세상이 기울자 마한(馬韓)을 세웠는데, 그 자손이 청주에 살아서 한씨로 불리었다. 공의 고조(高祖)는 청평군(淸平君) 한언(韓堰)이고, 증조(曾祖)는 증(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한홍주(韓弘澍)이며, 할아버지는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 한진(韓鎭)이다. 또 아버지는 돈녕부 정(敦寧府正) 증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낭성 부원군(琅城府院君) 한수경(韓守慶)이며,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유씨(柳氏)로 진주(晉州)가 본관이고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유조의(柳祖誼)의 딸이다.
공은 명(明)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 21년 임인년(壬寅年, 1542년 중종 37년) 11월 1일에 태어났다. 명나라 세종 말년 우리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 21년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가 되고,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에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대교(待敎)로 승급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봉교(奉敎)에서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기고,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병조 좌랑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년)에 예조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에 들어갔으며, 인종의 비인 인성 태후(仁聖太后)의 국상을 당하였을 때 교서(敎書)를 받들어 명정(銘旌)을 쓰고 신주를 쓰고 나서 정5품 벼슬인 형조 정랑에 승진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병조로 돌아왔다가 다시 정5품인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기고 여러 차례 전직되었다가 또다시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정4품인 장령(掌令)으로 승급하였으나, 질병으로 체직(遞職)되고 정4품인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에 제수(除授)되어 호남 지방을 순무(巡撫)하라는 명을 받았다. 돌아와서는 정6품 벼슬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제수받았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정4품 벼슬인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서 종3품인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이듬해 정3품 벼슬인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급하여 온성 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로 나갔는데, 청렴한 정치로 백성의 마음을 얻었으며, 모든 북쪽 변방의 야인들인 번호(藩胡)들이 기꺼이 복종하였다. 1년 만에 정3품 관직인 승지(承旨)로 소환되자 부로(父老)들이 눈물을 흘리고 변방의 추장(酋長)들이 모두 국경을 넘어와 늘어서서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후덕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해에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는데, 솔선하여 절검(節儉)하며 폐정(廢政)을 바로 다스리고 저축에 힘쓰니, 부고(府庫)가 가득히 넘쳐 많은 재물인 거만(巨萬)이 쌓였다. 때마침 명나라에서 경사가 있어 포고하는 조서를 가지고 온 반조사(頒詔使)가 왔는데, 이이(李珥)가 원영사(遠迎使)로 이곳에 와서 이를 보고 장하게 여겨 사실대로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상으로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찝)를 하사하였다. 임기가 찼으나 정치를 잘하여 1년 더 유임되었다.

▲ 한준신도비 옛모습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정3품 당상관인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으나,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연이어 진주(晉州), 순천(順天)과 충청도, 전라도 두 성(省)에 비의(備擬)된 것을 임금이 오랜 동안 외직에 나가 노고하였다 하여 다시 승정원으로 불러들였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정3품 당상관인 도승지(都承旨)에서 다시 정3품 판결사(判決事)로 옮기었고, 뒤에 연이어 호서와 호남 지방을 안찰(按察)하였는데, 호남을 안찰할 때 특별히 종2품 문관이나 무관에게 주어지던 품계인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명나라의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돌아와 황해도를 안찰하였는데, 어느 고을에서 정여립(鄭汝立)의 음모를 보고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상변(上變)한 일로 공은 특별히 정2품의 품계인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고 정2품 관직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연임하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정2품 관직인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기고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청천군(淸川君)에 봉하여졌다. 당시 두 아들이 함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문희연(聞喜宴)을 베풀었는데,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에 있다가 멀리 등촉의 불을 바라보고 그 연유를 물은 뒤에 곧 궁중의 귀인(貴人)을 시켜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인 선온주(宣醞酒)를 내렸으니, 총애가 이처럼 두터웠다.
어떤 왕자가 산택(山澤)의 이권을 독차지하여 거민(居民)이 직업을 잃고 원망이 자자하였는데, 공이 세 차례에 걸쳐 임금에게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니, 임금이 마침내 윤허를 하였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삼고자 하였으나 영의정이 이를 저지하여 무산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태평한 지 2백 년 만에 갑자기 난리를 만나서 주(州)ㆍ군(郡)이 와해되고 상주(尙州)ㆍ충주(忠州) 두 주가 연이어서 패전하여 함락되었을 때 공이 임금에게 아뢰어 각지에서 병졸을 많이 징발하여 왕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의주(義州)로 행차하며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국사를 감독하게 하고 모든 왕자를 각지에 나누어 보내었다. 이때 선조의 여섯 번째 왕자인 순화군(順和君) 이보(李)가 관동(關東)으로 나가게 되어 공이 명을 받아 순화군을 따라갔는데, 영평(永平)에 이르러 임금으로부터 행재소(行在所)로 따라오라는 명이 있었으며 평양에 이르러 정2품 상계의 품계인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급되었다.
적이 벌써 평양까지 다가와서 임금은 다시 영변(寧邊)으로 행차하고 세자는 강동(江東)으로 나갔다. 이때 공이 세자시강원의 빈객(賓客)으로서 세자를 따르게 되었는데, 임금이 급히 다시 임금을 따르라는 명을 내렸으나, 승정원에서 미처 전달을 못하였다. 양덕(陽德)에 이르러서야 왕명을 듣고 급히 의주로 달려가 임금을 뵙고 죄를 청하니, 임금이 다시 세자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왜적이 물러가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공을 사절로 보내어 평양 수복을 주달(奏達)하고 영하(寧夏)를 평정한 것을 축하한 다음, 이어서 뒷일의 선처를 부탁하도록 하였는데, 명제(明帝)가 유정(劉綎)에게 군사 5천을 전란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하고 왕세자는 앞으로 호조 판서ㆍ병조 판서와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에 내려가서 군사(軍事)를 총괄하도록 칙명(勅命)을 내리므로, 공은 정2품 장관인 호조 판서가 되어 곧 임지로 떠났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복명(復命)을 하고 나서 강서(江西)로 피난간 노부모를 뵙기 위하여 길을 떠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장남 한여숙(韓汝淑)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에 임명하여 편안히 봉양토록 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다시 표문(表文)을 받들고 사절로 가서 사례를 하고 이어 세자 책봉(冊封)을 허락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명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중도에서 병이 위급하여져서 임금이 태의(太醫)를 보내어 간호하게 하였는데, 복명을 하고 나서 병세가 더욱 위독하여져 다시 벼슬을 하지 못하고 6년을 지냈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 봄에 아버지가 몰(歿)하였고, 다음 해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10월 22일에 공이 졸(卒)하니, 향년은 60세이고, 어머니의 나이는 8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파조(罷朝)와 철시(撤市)를 이틀 동안 하도록 하였다. 그해 모월(某月)에 예장(禮葬)으로 인천(仁川) 계곡(桂谷)에 안장하니, 선영(先塋)을 따라 간 것이다.
공은 장대(長大)하고 위의(威儀)가 있으며, 중후(重厚)하고 과묵(寡默)하여 당시 사람들이 ‘장덕거인(長德巨人)’이라 불렀다. 성품이 교유를 좋아하지 않고 명성과 위세를 회피하였으며, 검약을 좋아하고 자기의 맡은 직무에 근면하여 쉬운 업무와 어려운 업무를 가리지 않으므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두고 ‘산악(山嶽)에 비길 만하다’고 말하였다.

▲ 한준신도비옥개

정경부인(貞敬夫人) 최씨(崔氏)는 완산군(完山君) 최재(崔宰)의 후손이자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 최정수(崔貞秀)의 딸로, 공보다 6년 전 9월 14일에 졸(卒)하여 같은 터에 안장하였는데, 8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3품 당상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여숙(韓汝淑), 창수(倉守) 한여징(韓汝徵), 정6품 관직인 형조 좌랑(刑曹佐郞) 한여옥(韓汝沃), 정5품 호조 정랑(戶曹正郞) 한여흡(韓汝潝), 시령(市令) 한여철(韓汝澈),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여직(韓汝溭), 종6품인 부사과(副司果) 한여제(韓汝濟), 진잠 현감(鎭岑縣監) 한여형(韓汝泂)이고, 사위 두 사람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기빙(尹起聘)과 종5품인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김인룡(金仁龍)이다. 또 측실(側室) 소생의 두 아들은 종3품 무관직인 첨절제사(僉節制使) 한여필(韓汝泌)과 무과에 급제한 한여홍(韓汝泓)이고, 또 세 딸은 최승서(崔承緖)와 김득현(金得賢)의 아내와 현감(縣監) 심정세(沈挺世)의 첩이다. 이들 자매의 차례는 심정세의 첩이 둘째 딸이다.
첨지중추부사 한여숙은 아들이 없어서 조카 한무(韓楙)를 후사로 삼았는데, 한무는 벼슬이 현감이고, 3남 3녀를 두었으니, 한오상(韓五相)ㆍ한오필(韓五弼) 두 아들은 일찍 죽었고, 한오상은 증 주서(注書)이다. 셋째 아들 한태상(韓泰相)은 양자로 출계(出繼)하였다. 사위는 신상, 홍만시(洪萬始), 종실(宗室) 청평군(淸平君) 이전(李洤)이다. 한오상은 한균(韓均)을 낳았으나, 역시 일찍 죽어 아들이 없어서 당질(堂姪) 한연(韓埏)을 후사로 삼았다.
창수 한여징은 서출 한익(韓杙)을 두었고, 한익은 한오악(韓五岳)ㆍ한오명(韓五明)을 두었는데, 한오명은 무과 출신이다.
정6품 관직인 좌랑 한여옥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부사(府使) 한휴(韓休)와 한보(韓保)이고, 사위는 승지 이유성(李惟聖)과 참봉 황회(黃淮)이다. 한휴의 아들 한순상(韓舜相)은 생원으로 세 딸을 두었으니, 사위는 생원 이질(李耋), 진사 이하명(李夏命), 윤정린(尹挺麟)이다. 한보(韓保)는 아들이 없어서 한태상을 후사로 삼았다. 한순상의 아들은 한재(韓載)이다.
정5품 관직인 정랑 한여흡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절(韓梲)ㆍ한결(韓)ㆍ한필(韓榓)인데, 한절은 정5품 관직인 사의(司議)를 지냈고 한결은 무과 출신이며, 사위 김정(金埥)은 현감이다. 서출 한격(韓格)은 출계(出系)하였다. 한절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오휘(韓五徽)ㆍ한기상(韓夔相)ㆍ한명상(韓命相)이고 사위는 정계주(鄭繼胄), 종실 능평수(綾平守) 이신(李信), 권대균(權大均)이다. 한오휘는 자녀가 없고 한기상은 출계하였다. 한결은 한옥(韓)ㆍ한방(韓埅)ㆍ한승(韓陞)을 두었는데, 한옥은 생원이다. 한명상(韓命相)은 한증(韓增)ㆍ한육(韓堉)ㆍ한감(韓堪)을 두었다. 한필(韓榓)은 한오익(韓五翊)을 두었으나 일찍 죽어서 아들이 없다. 사위는 최기준(崔基峻), 남익(南翊)인데, 남익은 진사이다.
시령 한여철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빈(韓彬)이고, 사위는 심지헌(沈之瀗)과 최도원(崔道源)인데, 심지헌은 현감이다. 한빈은 4남을 두었으니, 한오복(韓五福)ㆍ한오장(韓五章)ㆍ한오희(韓五喜)ㆍ한오옥(韓五玉)이다. 한오복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한양(韓量)과 한중(韓重)이다.
판서 한여직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혜(韓橞)이고 사위는 심정(沈靖)과 윤강(尹堈)인데, 윤강은 사평(司評)으로 있다. 서출 한박(韓樸)은 무과 출신으로 절충 장군이다. 한혜는 아들 한오규(韓五奎)를 두었으며, 한오규는 한숙(韓塾)을 두었는데, 한숙은 생원이다. 윤강은 군수 윤세장(尹世章)을 두었다.
사과 한여제는 아들이 없고 딸 하나가 있는데, 사위는 진사 채정후(蔡鄭後)이다.
현감 한여형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한무(韓楙)는 백부(伯父) 한여숙의 후사가 되었고, 다음은 한허(韓栩), 다음은 진사 한후(韓)이며, 사위는 정식(鄭栻), 성담(成燂), 종실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이다. 한허는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진사 한정상(韓定相), 한응상(韓應相), 한유상(韓有相), 한득상(韓得相), 한임상(韓任相)이고, 사위는 이경(李經)이다. 한후는 사위가 셋인데, 윤이필(尹以弼), 생원 양승(梁昇), 정선(鄭瑄)이다. 한정상은 한점(韓坫)ㆍ한훈(韓塤) 두 아들을 두었으며, 한응상은 한연(韓埏)을 두어 한오상의 후사로 삼았다.
도사 김인룡(金仁龍)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김진해(金震海)ㆍ김기해(金起海)ㆍ김제해(金濟海)이고, 사위는 첨지중추부사 윤개(尹塏)이다. 김진해의 아들 김익창(金益昌)은 문과 출신으로 현감이다. 첨지중추부사 윤기빙(尹起聘)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완(尹浣)과 선전관 윤순(尹淳)이고, 사위는 통제사(統制使) 유임(柳琳)이다.
첨사 한여필은 양아들 한격(韓格)이 있는데, 한격은 3남을 두었으니, 한치상(韓致相)ㆍ한취상(韓就相)ㆍ한의상(韓義相)이다. 한여홍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역(韓櫪)이고, 사위는 유배(柳培)이다. 최승서(崔承緖)는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최길(崔趌)이고, 사위는 문과 출신 정기태(鄭基泰), 윤익(尹瀷), 종실 충릉령(忠陵令) 이명길(李命吉), 유이화(柳以華)이다. 김득현(金得賢)은 2남을 두었으니, 김창수(金昌壽)와 김중수(金重壽)이다. 현감 심정세(沈挺世)의 첩이 된 측실 소생의 딸은 자식이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뛰어난 재주와 훌륭한 덕(德)은
나라의 호걸이요,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렸으니
목숨 바친 충절이로다.
돌에 새기고 정(鼎)에 새기니,
훌륭한 신하의 업적이로다.
                                  한준(韓準)(국역, 국조인물고) 인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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