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를 상징하는 섬이다. 삼학도라는 이름은 한 젊은이와 세 처녀의 비극적 사랑에서 유래했다. 전설은 이렇다. 옛날 유달산에서 한 젊은이가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그 늠름한 기개에 반한 마을의 세 처녀가 수시로 드나들어 수련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잘못을 깨달은 젊은이는 세 처녀에게 수련이 끝날 때까지 다른 섬에서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젊은이의 말대로 다른 섬에 가서 기다리던 세 처녀는 그리움에 사무쳐 죽고, 세 마리 학이 되어 유달산 주위를 돌며 구슬피 울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젊은이가 세 마리 학을 활로 쏘아 명중시키니 그 학이 떨어진 유달산 앞바다에 세 개의 섬이 솟아올랐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그 섬을 ‘삼학도(三鶴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일제강점기 삼학도를 배경으로 한 관광엽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소유였다가, 광복 후인 1965년에는 3개의 섬을 연결하는 목포외항 확장사업이 추진되면서 삼학도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채 육지가 되어 석탄부두와 비료 공장, 정유 공장, 제분 공장이 들어선 공장지대로 전락했다. 다행히 2004년부터 삼학도 복원사업을 시작한 목포시는 삼학도 주변에 물길을 만들고 섬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세 개의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인 대삼학도에 지난 2006년 ‘난영공원’을 조성하고 경기도 파주에 있던 이난영의 묘를 이장하여 수목장으로 안치했다. 또 지난 2013년에는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을 개관하여 20세기 목포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사람이 삼학도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세 마리의 학이 다시 힘찬 날갯짓을 펼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은 삼학도 ‘난영공원’의 주인공 가수 이난영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 삼학도 이난영 공원에 있는 난영의 묘. 지난 2006년 20년생 백일홍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안장되었다.(사진제공 목포시청)

이난영의 노래 <목포는 항구다>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목포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이다. 지난 2004년, 목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됐는데 영화는 노래에서 연상되는 아련한 고향, 그리운 고향으로서 목포의 이미지 대신 폭력적 이미지를 부각시켰다는 평이다. 아무튼 이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 제목을 패러디해서 목포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DJ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이난영의 이름을 들지 않을까한다. 물론 이난영은 일제강점기 때 가수로서 친일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일제강점기에 부른 200여 곡 중에 군국가요인 ‘이천오백만 감격’과 ‘신춘엽서’ 등 2곡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비록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논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는 목포의 상징적 인물로서 이난영의 숨겨진 면면과 함께 그녀에 대한 목포 시민들의 애정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목포대학교 최성환 교수가 정리한 이난영 연보에 따르면, 난영은 1916년 6월 6일, 당시 주소로 목포부 양동72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옥례(玉禮)이고 호적상으로는 옥순(玉順), 난영(蘭影)은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의 전신인 목포공립보통학교에 통합)를 4년 중퇴하고 어머니가 있는 제주도로 건너갔다. 1932년, 16세 때 태양극단의 제주도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단원이 되었다.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을 녹음했으며. 태양극단 일본 오사카 공연에서 이철 사장을 만나 오케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었다. 1933년 '향수', '불사조', 1934년에는 '봄맞이'를 불러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1937년 11월 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결혼했다. 1939년 남편 김해송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 꿈’과 1942년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가 대히트했다. 광복 후에는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의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했으며, 김해송은 6·25때 납북되었다. 1959년 두 딸과 조카로 구성된 '김시스터스'가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본인도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했다.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 미국 CBS 인기버라이어티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이난영. 사진 중앙.(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이상 이난영의 연보를 간략히 살펴봤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난영 하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다소곳한 자세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사실 이난영은 생전에 부른 2백여 곡의 노래를 통해 트로트 뿐만 아니라 민요에서부터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낸, 요즘 말로 하면 음악적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팔색조 가수였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곡으로 평가받는 ‘다방의 푸른 꿈’을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일본, 중국 무대를 넘나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의 리더로도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이난영은 연예기획자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편 김해송과의 사이에서 난 7자녀를 ‘김시스터즈’. ‘김보이스’라는 그룹으로 만들어 미국에 진출시켰다.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으로 1959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한 이후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애칭을 얻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963년 미국에 간 이난영은 미국 CBS 인기버라이어티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해 자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 때의 에피소드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재치 있고 배짱 좋은 여성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이난영은 자녀들과 함께 미국 민요 ‘마이클, 노를 저어라(michael row the boat ashore)’를 부르기로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 가사를 외우지 못했다. 무대에 오른 이난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임이 넘던 고개요.”라며 우리말 아리랑 가사를 박자에 맞춰 척척 불렀다. 워낙 천연덕스럽게 부르다보니, 사정 모르는 미국인들, 이 당당하고 노래 잘하는 한국 가수에게 브라보를 연발했던 것은 물론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처럼 한복을 차려입고 다소곳하게 노래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50년 후의 지금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의상과 무대 매너를 보여준다.

▲ 한국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에 관한 음악다큐멘터리이다.

‘김시스터즈’의 성공은 구성원들이 당대 최고의 작곡가와 가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연예기획자로서 이난영이 보여준 선견지명과 완벽에 가까운 준비가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난영은 자녀들에게 노래뿐만 아니라 발레, 승무 등의 춤과 가야금, 북, 장구, 기타, 섹소폰 등의 악기연주까지 가르쳐서 한 사람이 최소 열 개 이상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아무리 곤궁해도 아이들 교육비만큼은 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하니 이런 철저한 준비 덕분에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난영 사후인 1969년, 목포시민 박오주 씨는 사재를 털어 유달산 기슭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세웠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 현재 목포시 향토유적 제27호이다. 당시 목포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 씨는 이난영이 죽자 병마와 싸우면서도 5년 동안 30만 원의 적금을 모아 이 노래비를 세웠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목포와 함께 하며 목포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을 어루만져 준 목포의 노래를 차마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난영은 사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용미리 묘지에 쓸쓸히 묻혀있었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목포 시민들이 지난 2005년  「이난영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고향 목포로 이장(移葬)을 추진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후 41년 만인 2006년 3월,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와 유달산이 바라보이는 삼학도 백일홍 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안장되었다. 이난영은 목포의 상징이고 자랑이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었다면 ‘목포의 눈물 노래비’도 ‘난영공원’도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혹의 세월, 목포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달래준 이가 이난영이라면, 구천을 떠돌던 그녀의 혼백을 고향으로 인도한 이는 목포시민들이었으니 이로써 목포와 이난영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오는 주말에는 유달산 기슭 어디쯤, 삼학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찻집에 앉아 난영의 노래나 실컷 들어야겠다. 지금쯤 유달산에는 동백꽃이 활짝 피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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