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엄마, 고구마줄기 김치 짱이야! 열무김치보다 부드러워 먹기 좋아.”
여름이면 우리 집 밥상에 빠지지 않는 고구마줄기 김치. 친구들은 손이 많이 가는 고구마줄기김치를 어떻게 담궈먹느냐고 하지만 난 어릴 때부터 먹어 본 김치라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면 자동으로 고구마줄기 김치를 담근다.
딸이 고구마줄기 김치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나의 기억은 달리고 달려 어린 시절 우리집에 가 있다. 
“아후 매워.”
엄마가 내 입에 넣어주는 고구마줄기 김치에 혀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자꾸 먹히는 김치. 입술이 아리도록 매웠다. 먹고 나면 속이 쓰렸다. 그러면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마셨다. 물배가 찼다.
여름과 가을이면 먹을 수 있는 고구마줄기 김치. 엄마는 고구마 줄기 껍질을 손톱이 까매지도록 벗겼다. 나도 고사리손으로 거들었다. 엄마는 밭에서 갓따온 빨간고추를 확독에서 거칠게 갈다가 찬밥 한 숟가락 넣어 같이 갈았다. 절여진 고구마줄기에 부추 넣고 새우젓으로 슴슴하게 간하면 끝이다. 별다른 양념도 없었다. 막담가먹는 고구마줄기 김치의 매력이 있다. 아삭아삭 씹히고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 어린나이에 먹기도 편했다.
생활이 편리해져 확독 대신 믹서기에 휘리릭 홍고추를 갈아 만든 고구마줄기 김치맛을 우리딸도 먼훗날 기억해줄까. 문득, 내가 살았던 집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 여기에 묶은 이야기는 작은 시골 마을의 수진이네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1. “내 동생 살려줘.”
엄마, 나, 동생 이렇게 셋이 살던 우리집이 시끌시끌했다. 이유는 무당이 우리집에서 굿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굿판 벌이는 사람들과 굿판 구경하러 온 동네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굿은 몸이 아팠던 동생을 위해 엄마가 내린 극약처방이었다. 지금 같으면 병원에 데리고 갔을텐데 그때는 읍내나 도시에 있는 병원보다 동네 무당집이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말로만 들어봤지 무당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엄마는 동생이 귀신이 씌여서 몸이 아프다면서 굿을 했다. 엄마는 동생을 방에 넣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밖에서 무당이 칼춤을 추고 팥을 집어 던지고 팥시루떡 한 말과 먹을 것이 차려진 제단 앞에서 춤을 추면서 혼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나는 해독 불가능한 장면이었고 무서웠다.
“덜커덕덜커덕 덜커덕덜커덕”
안에서 살려달라고 문을 흔들며 울부짖는 동생. 어린 나는 엄마에게 매달려 울며 말했다.
“엄마, 저러다 동생 죽겠어. 문 좀 열어줘.”
하지만 엄마는 나의 손만 잡고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 같으면 쫓아가서 문을 열어줄텐데 어렸던 나는 공포에 떨었다. 어떻게 굿이 끝났는지 모른다. 이후 기억은 없다. 아마 굿이 끝나고 나는 조금 전의 무서움은 잊어버리고  팥시루떡을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공포가 떠오른다. 동생이 굿판보다 더 크게 문을 흔들어대던 소리가 생생하다. 그 굿의 효험이 없었는지 동생은 금방 낫지 않았다. 골골하던 동생은 커 가면서 건강해졌다.
가끔 이 날이 떠오르면 마음이 아프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야하는데 병원이 흔하지 않던 그 시절에는 주술의 힘을 빌렸다. 동생은 그 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 날의 굿판을 한번도  입 밖에 꺼내 본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의 아픔을 들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두 잊어버렸는데 나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2.  뒷집 며느리 아기 낳던 날

찬 기운이 문풍지로 스며 들던 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다급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 엄마를 불렀다.
“양지댁, 자요? 우리 며느리가 아기를 낳으려고 하는데 좀 와줘야겠어요. 가위 좀 있으면 빨리 가지고 와주세요.”
엄마는 자다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해서 집을 나섰다. 마당에 보름달이 밝았고 지붕에는 서리 맞은 호박줄기가 말라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집에 돌아왔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았다.”
산부인과가 없던 시골에서는 동네 아줌마들이 서로 도와가며 산파역할을 했다.
그 며느리는 어제 낮에도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기를 낳다니. 아침밥 먹고 그 집 앞을 가보니 금줄이 쳐져 있었다. 금줄은 새끼 줄에 고추, 숯, 가지, 연필이 꽂혀 있었다. 금줄은 이 집에 새 식구가 늘었다는 자랑이기도 했고 아기가 있으니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시였다. 아이 한 명이 태어나면 온동네 사람들이 알았고 마음으로 축하해주었다.
몇 년 뒤 우리 큰오빠가 결혼했다. 새언니는 도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엄마는 며느리 출산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퇴원후 친정으로 산후조리를 가는 바람에 엄마는 인절미 한 말을 이고 어렵다는 사돈집으로 찾아가야 했다. 며느리와 손녀를 보기 위해서. 섭섭했던 엄마는 말했다.
“옆집 며느리는 애도 쑥쑥 잘 낳는데 돈 아깝게 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다냐.”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음을 새식구가 늘었음을 동네에 자랑하고 싶었는데 섭섭해서 늘어 놓는 푸념이었다. 우리 식구는 늘었지만 우리 집에 금줄이 없었다. 새언니가 몸조리를 끝내고 아기를 우리집에 데리고 왔을 때 엄마는 준비해둔 금줄을 걸었다. 할머니가 되었음을 자랑했다. 더불어 나도 고모가 되었다.
요즘은 아기 울음소리 듣기가 힘들다. 시골에서는 인구가 줄어들어 아기 태어나는 집이 귀하고 도시에서도 아파트 생활이 많다보니 아기 울음소리가 밖에 들릴 일도 없다. 온동네 사람들이 새생명의 탄생을 축하해주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닌 사십여년 전에.

 

3.  우물 파던 날 
우리 집은 우물이 없었다. 위 아래집이 붙어 있는 우리 집. 윗집에서 우물을 먼저 파서 우리 집에서는 우물을 팔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빨래는 냇가에서 하고 씻는 물은 가까운 냇가물을 길어다 썼다. 우리집은 물이 늘 귀했다.
드디어 울 집 마당에 우물을 팠다. 형만이 아버지랑 은희아버지가 삽과 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며칠을 팠다. 내려다보니 땅 속이 텅빈 수박통 같다.
형만이 아버지가 말했다.
"수진아~ 저기 침쟁이 집에 가서 물 한 주전자 떠와라. 그 집 물맛이 우리동네에서 최고 좋은 물이다."
나는 접시꽃이 핀 골목을 따라 그 집 우물에 가서 물을 떴다. 침쟁이할아버지 우물은 동산 밑에 있어 물이 시원하고 달았다. 노란 주전자에 물을 떠오자 아저씨는 흙탕물 가득한 깊은 땅 속에 부었다.
"이제 이 집도 시원한 물 실컷 먹을 수 있겠다. 우리 집도 우물을 파야하는데 걱정이다."
형만이네도 우물이 없었다. 형만이네는 방 2칸까지 전형적인 작은 초가집이었다. 우물이 없었다.
형만이 아버지와 울아버지는 친구 사이였다. 아버지 장례식 때, 아저씨는 상여를 인도하며 울아버지 저승가는 길을 도왔다. 그래서일까. 그 아저씨는 우리집 우물을 더 열심히 파주었다.
드디어 울 집도 우물이 생겼다. 세수하러 냇가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김칫거리 씻으러 냇가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 좋았다. 급할 때는 걸레도 우물에서 빨았다. 무엇보다 물을 길러 다른 집 우물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엄마는 한 여름에 먹는 물은  침쟁이 집에서 길어왔다. 그 집은 대문이 없어서 드나들기도 편하고 물이 많았고 무엇보다 물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집 우물은 물이 많지 않았다. 윗집 우물은 우리집보다 크고 깊어서 그 집 우물로 물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우물 없는 집이 있었다. 대문 없는 집 물을 길어다 썼다. 우물의 소유권은 있었어도 물은 누구나 쓸 권리가 있었던 것 아닐까.
가끔씩 우물 파던 날의 풍경이 떠오르면 마음도 부자가 된 기분이다.

4. 아버지 장례식
비가 왔을까. 눈이 왔을까. 진눈깨비가 날리기도 했다. 마당이 질척거려 짚을 깔고 멍석을 깔았다. 흰천막을 치고 손님들이 빼곡했다. 우리집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오기는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우울하고 절간 같았던 우리집이 하루 아침에 잔칫집이 되어버려 어리둥절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아홉 살. 엄마와 오빠 언니들이 울어서 나도 눈물이 났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가끔씩 네 살 동생과 나를 흰옷을 입혀서 아버지의 영정앞에 데리고 가서 울으라고 했다. 난 칭찬이 듣고 싶어서 큰소리로 울었다.
아버지 시신을 염 할 때 난 방문 앞에 있었다. 창호지 바른 문이 밝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어리니까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방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지 나는 상상조차 못했다.
가끔 생각했다. 그때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한 편으로는 안 보는게 나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살았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막연히 하늘나라가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가끔 생각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잘 있으라고, 아버지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허전함에 시달리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어쩌면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이별을 말했을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건지 모른다. 하지만 난 기억에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이였고 늘 있던 아버지가 없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할 아홉 살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나이가 들어 상담을 받으면서 아버지랑 30여년 만에 이별하며 말했다.
“아버지 막내딸, 아버지 없어도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하늘나라에서 또 만나.”

 

<언니네 글밭>은 2017년 여러가지연구소에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소통하고자 글 씨앗을 뿌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입니다. 작은 책으로 출판한 언니네 글밭의 글을 콩나물신문에 연재합니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