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알아가고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고, 예술은 자아 발견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원제는 ‘왜 우리의 고등학교들이 예술을 필요로 하는가?(Why Our Highschool Need the Art)다. 책의 의도를 설명하기에는 원제목이 잘 어울리지만, 내용을 샅샅이 읽어보면 한국판 제목이 더 적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예술 교육이 학교와 학생 간의 관계를 긴밀하게 할 수 있는 매개임을 주장하며 시작한다. 미국내 소수자 학생들의 학교 포기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예술교육(흥미와 관심)에 많은 자원과 접근성을 제공한 학교들이 졸업률 면에서 상위 1/3의 수준을 보였다.”며 예술 교육이 학생들의 졸업률을 높이고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는 통계를 통해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럼에도 현실의 예술교육은 냉대 받고 있다. 교육과정에서 “교육시수와 교육공간과 시설, 전문성을 갖춘 교사, 학교장과 부모의 지지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술 수업이 있더라도 “예술이 제공하는 강력한 배움과는 관련이 없거나 동떨어진 이러한 예술교육의 부수적 효과에 대한 고려들은 이 시대의 하나의 증상”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한탄한다.

예술과 놀이, 창작 욕구들은 인간이 타고난 능력인데, 상급학교로 진학 할수록 이 능력은 냉대 받고 있다. ‘수학을 포기 하겠어’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지만, ‘예술을 포기하겠어’는 쉽게 허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상에서 예술 교육이 가치 없다는 메시지를 받고 있다. 예술교육이 이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것인가?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효율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세계 곳곳에서 예술은 헐벗고 누추하다. 인간의 온몸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표상들이 이런 취급을 받을 줄 몰랐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이 표상들도 '투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예술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의 그림은 물론이거니와 구전되는 노래, 고대의 춤과 악기, 연극 등이 그 흔적이다. 자본주의가 진화했지만 교육은 그리 진화하지 못했다. 공장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예술 교육을 중요시 했을리 만무하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된 경쟁 교육 체제에서 예술 교육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예술이 본능이라면 예술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배우고 펼쳐야 할 영역이다.  
저자는 예술의 교육적 효과를 학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논증해 간다. 예술이 삶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예술은 유형의 결과물을 내 온다. 성취물이 확인되는 것이다. 마치 사냥꾼이 사냥 후에 사냥감을 포획하는 기쁨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유형의 결과물에는 우리의 상상력이 담겼으며, 자신이 담겨있다. 사냥감은 ‘사냥감’으로 존재하지만, 예술은 나의 행위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어, 신을 경배하듯 유형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자신을 경배해도 좋을 것이다. 유형의 결과물은 인간의 상상과 행위를 담은 피조물이며, 인간은 신이 된다. 예술의 쾌감은 창작물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 행위를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 오감을 곤두세우고 관찰하고, 수용하면서 세계에 몰입한다. 그리고 공감한다. 공감의 궁극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감정의 몰입일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에 자신의 감정을 담는다. 작품에 감정을 담기 위해 자신의 감정에 몰입한다. 그리고 다시 작품을 보면서 감정에 몰입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공감한다. 감정에의 집중과 몰입, 공감. 이것이 바로 예술이 주는 삶의 힘이자 교육적 힘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일각에서는 ‘필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필자의 죽음’을 가장 잘 구현해 내는 분야가 예술이다. 창작자는 다의적으로 의미를 전달하지만, 해석자들은 더 다의적으로 예술 작품을 해석한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인정된다는 점에서 다른 교과들과 달리 각 개인이 존중받을 수 있으며, 무수한 정답이 존재하기에 흥미롭다. 타인의 생각에 대한 경청과 존중은 다시 공감으로 이어진다. 예술은 또한 ‘과정 지향적’이다. 예술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해 보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그려보고, 불러보고, 춤을 추고, 시연해 본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질문한다. 내가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가? 이 표현은 적당한가? 수많은 질문들이 수반되면서, 감정 뿐 아니라 인지능력도 발달시킨다. 예술은 탐구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적 과정을 통해 성찰의 세계로 초대된다.

공감과 해석, 존중과 과정 지향성은 관계성을 넓힌다. 작품과 나의 관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교사와 동료와의 상호작용, 전시될 때 관객과의 대화 등 예술은 무수한 관계를 파생한다. 예술이 사회적 메시지(무조건 담고 있다. 다만 가치가 다를 뿐)는 더 넓은 세상에 관여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 작품과 작가에게는 책임감이 주어진다. 예술 교육은 개인적인 듯 보이지만 매우 사회적인 행위인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예술 교육이 주는 교육적 함의를 ‘피터팬’ 연극에 적용해 본다. 피터팬 연극의 제작에서 공연의 전 과정에는 위에서 언급한 교육적 의미들이 모두 포함된다.

작가는 ‘예술은 개인과 학교, 사회적으로도 매우 가치 있는 행위이며, 이를 위해 예술가이면서 운동가인 교사가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교사라야 학생들의 동료이자 공동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서술의도를 해석한다.
교육이나 상담, 사람을 만나는 모든 과정에서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에 찬양하면서.
이 책의 한국판 제목은 ‘예술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이지만, 나는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가 관심사다. 나는 삶과 예술에 대한 검색을 통해 이 책을 발견했다.

삶과 예술, 교육.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