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동생이 태어난 날

바람이 쌀쌀해지면 귓가에 맴도는 말이 있다. 
“애기 눈 매우니 고추자루 밖에 내 놓아라.”
엄마가 동생을 낳았을 때, 내 귀에 새겨진 말이다. 그 목소리가 외할머니인지 누구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만은 또렷히 기억난다.
그 동생이 태어난지 백 일도 안되 세상을 떠난 동생인지 지금 동생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작년에 언니에게 물어보니 나의 기억으로 봤을 때, 아마 죽은 남동생일거라고 했다. 언니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는 백 일도 안되어 하늘나라로 간 남동생을 밤에 밭옆에 묻고 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날이 기억난다고.  엄마의 마음을 떠올려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나를 업고 많이 울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슬픔도 모르고 엄마 등뒤에서 포근히 잠들었겠지.
엄마는 혼자서 어떻게 그 힘든 일을 했을까. 내가 어려서 그런 장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6.인삼장수 아줌마

조용한 우리집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아줌마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인삼을 파는 행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남자가 없는 집이니 부담없이 머물렀다 가기 좋았다. 더구나 애들도 초등학생이니 별로 눈치 볼 일도 없었다. 집은 누추하고 식사는 소박했지만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집이었을 것이다.
그 아줌마는 우리집에 오면 엄마에게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엄마에겐 반가운 손님이었다.
인삼 보따리에서 쌉싸름한 향기가 났다. 비싼 인삼 보따리는 나에겐 금덩어리 담긴 보자기만큼 크고 무거워 보였다.
아줌마는 가면서 인삼 팔고 받은 곡식이나 파삼을 놓고 갔다. 없는 집에 와서 하루 묵고 가는 것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엄마와 행상하며 여행하는 아줌마 누구의 삶이 더 고달팠을까. 삶에 지친 엄마도 그 날만큼은 한숨과 걱정을 멈추고 맘편히 이야기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속마음 털어 놓는다고 동네 소문날 일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7.  항아리는 보물단지
장독대엔 항아리가 가득했다. 아주 큰 항아리에서부터  아주 작은 항아리까지. 그 쓰임새도 다양했다. 간장, 고추장 같은 장을 담아놓았다. 그 중에 제일 큰 항아리는 엄마의 냉장고나 마찬가지였다. 그 곳엔 먹을 것이 가득했다. 당시는 귀했던 쇠기름 한 덩어리도 들어 있었고 곶감, 유과, 알록달록한 과자, 콩, 팥, 깨, 들기름, 참기름등이 들어 있었다. 가끔씩 곶감 훔쳐 먹으려고 커다란 항아리 뚜껑을 열고 안을 뒤지다보면 어둠 속에서 잡히는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엄마가 숨겨 놓은 비상금이었다. 그 돈을 만질 때의 촉감은 뭔가 은밀한 것,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금단의 영역을 침범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늘도둑 소도둑'된다는 속담을 뼛속깊이 새기고 있던 나는 그 돈을 만지자마자 불에 데인 사람처럼 얼른 손을 떼었다. 그리고 착하게 곶감만 한 개 슬쩍 빼먹었다. 새카맣고 쫀득쫀득하던 그 곶감은 어찌 그리 맛나던지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았다. 돈보다는 달디단 곶감이 더 좋았다.
돈이 귀하고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기에 어른들은 아껴야 된다는 생각에 자꾸 숨겼던 것이다.

 

엄마의 비밀 항아리는 또 있었다. 그곳은 허를 찌르는 곳이었다. 바로 부엌의 나무창고아래였다. 아버지 제삿날, 엄마가 그 곳에서 밤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왜 나무헛청 바닥을 파고 있을까. 호기심에 나도 파보았다. 그 곳에는 작은 항아리가 묻혀 있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요술단지라도 발견한 기쁨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손을 넣으니 모래가 있었다. 왕겨도 있었다. 그 속에 밤이 있었다. 엄마는  밤을 모레와 왕겨를 섞어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보관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두더쥐처럼 부엌 바닥을 팠다. 그리고 밤을 꺼내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좀더 큰 밤을 골라 먹기 위해 밤을 뒤적거리다 보니 어느 날, 종이느낌의 무언가가 만져졌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꺼내보니 그것은 곱게 접힌 신문지였다. 그안에는 1000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엄마의 손을 통해서만 돈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 직접 이렇게 돈을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짜릿함. 누가 볼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돈을 다시 놓았다.

그리고 밤을 꺼내 먹었다. 땅속 항아리에 묵은밤은 얼마나 달콤한던지. 허기지던 나의 봄은 밤을 훔쳐 먹으면서 지나갔다. 친구는 원기소를 먹으며 영양보충을 했지만 나는 묵은밤을 먹으며 봄을 견뎠다. 배도 고프고 사랑도 고프던 그 시절이었다.

8. 종합선물세트 돌리던 날

작은 오빠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년 정도 백수로 지내다 취직했다. 첫 월급을 받아 신작로 점방에서 종합선물세트 열 상자를 싹쓸히해왔다. 반짝거리는 포장지에 리본으로 곱게 싼 종합선물세트. 오빠는 동생과 나에게 한 세트씩 안겨줬다.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늘 그림의 떡처럼 비쌌던 종합선물세트. 티비 광고에서나 보던 과자세트. 아주 특별한 손님 오실 때 받아 동생이랑 아끼고 아껴 먹던 종한선물세트를 통째로 받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계란과자, 스카치 사탕, 껌, 비스켓.......
오빠는 첫 월급기념으로 엄마 빨강 내복을 선물했다. 나와 동생에게는 유명메이커 목도리와 장갑을 사왔다. 티비 광고로만 보던 유명메이커를 내가 선물로 받다니. 갑자기 신데렐라라도 된 기분이었다.
오빠는 나에게 종합선물세트를 가까운 이웃들에게 돌리라고 했다. 발 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면서 여덟 세트를 돌렸다. 공부 잘해서 취직한 건 오빠인데 칭찬은 내가 다 들었다.
대형마트에서 과자 종합선물세트를 보면 그때 추억이 떠오른다. 풋풋한 스무 살이던 오빠도 오십을 넘었고 나도 오십을 바라보고 있고 동생도 마흔을 넘긴 아저씨가 되었다. 이젠 아련한 추억의 맛 과자 종합선물세트.

 

9. 이 지붕에 던지기
"엄마 앞니가 흔들려"
"어디 보자 언능 빼야겄다"
나는 덜렁거리는 송곳니를 혀로 건들며 엄마 손에 이끌려 문 앞으로 갔다.
엄마는 흰실을 가져와 내 이를 야무지게 묶었다. 실 한쪽을 문고리에 친친 감았다. 곧 떨어질 것 같은 이는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계속 붙어 있었다. 앞니 뺄 때의 경험이 있던 나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때였다. 엄마는 내 등짝을 치며 말했다.
"야~저기 비행기 날아간다" 테레비에서나 보던 비행기가 날아간다는 말에 하늘을 쳐다보자 엄마는 문고리를 힘껏 잡아 당겼다. 순간 입에서 이가 빠져나갔다. 금새 피가 번지고 시원섭섭한 느낌이었다.
엄마는 피 묻은 송곳니를 사정 없이 지붕에 던지며 주문을 외웠다.
"우리 수진이 헌 이 줄게. 새이 다오. 
나의 분신은 내가 한 번도 올라가보지도 못한 지붕에 올라가서 나와 이별했다. 잇몸이 허전함도 잠시. 어느 날 보니 이가 돋아났다. 우리집 지붕은 우리 6남매의 이들의 무덤이었다.

10. 담장 너머 시루떡과 도시락

일 년에 한 번, 상기 오빠 생일이면 담장너머 떡과 도시락이 왔다. 달콤하고 거친 팥이 묻은 팥수수떡과 장조림과 멸치 반찬이 든 도시락. 엄마는 뭐하러 이런 것 주느냐면서도 당당하게 받았고 상기오빠 엄마는 은혜라도 갚는 듯 고맙다며 건넸다. 어린 나는 마냥 좋기만 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엄마에게 떡과 도시락에 얽힌 사연을 들었다. 
작은오빠가 태어나고 다음 해, 옆집 상기 오빠가 태어났다. 옆집아줌마는 늦둥이 먹일 젖이 잘 안 나왔다. 늦둥이는 배를 곯아야했다. 암죽을 먹여도 아기는 칭얼대고 아프고. 할 수 없이 젖먹이가 있는 우리 엄마 젖을 먹였다.
엄마는 자기 자식 먹이기도 모자라는데 옆집애기까지 먹이려니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을 것.  담장 하나 사이에 두고 사는 처지고 매일 얼굴 봐야 하고 더구나 애기가 배 고파 우는 걸 보고 가만 있을 수 없었겠지.
남의 자식에게 젖 먹이는 기분은 어떤것일까.
나 같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때 이야기 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먹는 것도 부실해서 니 오빠 줄 젖도 모자라는데 가가 많이도 먹더라.”
엄마는 상기오빠가 많이 먹었다고 말하는 걸 보면 남의 자식에게 젖을 물렸지만 사랑까지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새끼는 아무리 먹어도 밉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능이리라.
지금은 모유가 없으면 마트에서 분유를 사 먹일 수 있으니 젖동냥은 옛날 이야기다.

 

11. 장판 밑, 금고?
어린시절이었다. 아랫목 구석 장판 밑은 금지구역이었다. 그 곳에는 돈이 있었다. 우리집 금고였다.
장판을 들추면 그 곳에는 종이돈, 동전. 중요한 영수증이 있었다. 잊어버리지 않게 보관하는 장소였다. 
엄마는 언니, 오빠들이 돈을 달라고 하면 꼭 장판을 들추고 돈을 꺼내주었다. 마치 금덩어리를 건네는것처럼 소중하게 건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돈의 쓰임새를 알아가던 즈음이었다. 가게 가면 맛있는걸 사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파서 오랜시간 방에 누워 계실 때였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주무시는 걸 확인했다.
떨리는 손으로 장판 밑을 들추었다. 훅~하고 끼치던 흙냄새와 구들냄새가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곳은 신세계였다. 돈 들이 가득했다. 500원짜리 지폐, 100원짜리 지폐 50원짜리 동전, 내가 좋아하는 1원짜리도 있었다. 난 500원짜리 종이 돈을 집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돈을 만져본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장판을 덮었다.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다. 
난 그 돈을 가지고 학교 앞 가게로 갔다. 처음에는 부자집 친구가 가지고 다니던 수련장을 사고 싶었다. 줄 긋기, 달팽이 모양 따라그리기, 세모모양 네모모양 따라그리기를 하던 친구의 수련장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련장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먹을 것만 잔뜩 샀다. 아폴로, 쫄쫄이, 건빵도 한 봉지 사서 실컷 먹었다. 나머지 돈은 멜빵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변소간에 가서 앉았다.커다란 항아리에 널빤지가 놓여 있던 엄청나게 큰 항아리였다. 이른 봄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다 일어설 때였다. 멜빵 바지 앞면에 달려 있던 돈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똥통에 그대로 빠져버렸다. 아~ 아까운 돈.
변소 밖으로 나오니 삼월의 꽃샘추위가 더 추웠다.

12. 누에
나의 이십년은 누에와 함께했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 방에는 누에가 가득했다. 엄마가 어느 날 나를 낳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에와 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엄마가 나를 낳던 날도 누에는 마지막 잠을 자기 위해 뽕잎을 엄청나게 먹는 때였다. 엄마가 나를 낳았다. 방에서는 누에가 배가 고파 뽕잎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엄마는 아기를 낳았으니 뽕잎을 따러 갈 수 없었다. 엄마는 큰오빠와 아버지에게 뽕잎을 따오라고 사정도하고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한량 같던 이들은 가지 않았다. 나를 낳은 날, 누에는 굶었다. 엄마 마음도 아팠을 것이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의 젖을 물리며 엄마는 누에의 굶겨야 했다. 누에를 잘 키워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속상했다. 
엄마는 다음 날 몸을 추스려 뽕잎을 따러 갔다. 가난한 살림에 뽕밭이 따로 있을리 없다. 그나마 밭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뽕잎은 이미 따다 먹이고 없었다. 엄마는 뽕잎을 따러 산으로 갔다. 산에는 누에가 먹을 주인 없는 야생 뽕잎이 있었다. 가을이면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달리는 가시달린 나무에 돋아난 꾸지뽕잎이 있었다.
엄마는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뽕잎을 훑었다. 귀에서 어제 낳은 아이가 젖 달라고 보채는 소리도 들렸다. 마음이 바빴다. 아기에게 젖도 물리고 누에에게 뽕잎도 던져줘야 했다. 뽕잎  한 자루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집에서 쫄쫄 굶고 있는 누에에게 얼른 먹여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젖도 찌르르 아팠다.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네에 들어오다 엄마는 동네 초입에 숨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산후조리를 하고 있어야 할 엄마가 띵띵 부은 몸으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놀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자존심상 동정어린 시선도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누에게 뽕잎을 던져주었다. 누에가 어찌나 잘 먹던지 피로가 풀렸다. 그제서야 방 한쪽에 재워둔 아기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아기도 있는 힘을 다해 젖을 빨았다.
그봄 누에농사는 엄마에게 짭짤한 수입이 되었다. 농협에 나간 공판장에서 특등을 받아서 엄마는 오랜만에 목돈을 만져보았다.
엄마는 내가 복덩이가 누에농사가 잘 되었다고 나를 더 예뻐했다.

 

13. 쌀가마니

며칠 전, 시골에 사는 아는 분 댁에 갔다. 논에 벼가 여물기시작할 때였다. 그 분은 벼이삭 하나를 뽑더니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나락한알 뜯어 먹어보아라.”
벼 낟알을 입에 대고 이로 씹어보니 톡하고 하얀 액체가 나왔다.
작은 씨앗이 점점 커져 쌀이 되는 줄 알았는데 벼가 어릴 때 그 작은 껍질안에 우유처럼 물이 들어 있었다. 순간 놀랐다. 내가 오십 년 동안 먹어온 쌀이 이런 하얀물이 단단해져 쌀이 되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뿐, 어릴 때 알았는지 모른다.
가을이 되면 엄마는 벼낟알을 입에 넣어보고 벼 베날을 정했다. 어린 나는 엄마가 다 익었는지 어떻게 아는지 신기했다.엄마는 벼 벨 때가 되면  까실까실한 벼껍질을 이로 벗겨 낸다음 알멩이를 내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지금이 딱 벼 베기 좋겠다.”
아버지가 없는 우리집은 엄마가 잘 말린 나락을 리어커에 실었다. 나락 두 가마가 실린 리어커를 엄마가 끌고 나는 밀고 방앗간에 갔다. 동네 방앗간은 친구아버지가 직원으로 있는 곳이었다. 백열등 불빛에 눈이 아픈 커다란 방앗간. 그 곳에서 우리 나락이 방앗간 기계에 들어갔다. 커다란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기계의 크고 작은 컨베이어벨트들이 쉼없이 군인들이 발 맞추어 걷듯 딱딱 맞물리며 돌아갔다. 귀가 찢어질듯 아팠다. 쌀방아를 찧으며 일어나는 먼지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드디어 하얀 쌀이 쏟아져 나왔다. 한쪽으로 싸래기도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나에게 금쪽 같은 흰쌀을 지키라하고 왕겨가 쏟아지는 곳에서 왕겨를 푸대에 쓸어 담았다. 마치 쌀 한 톨을 챙기듯이 살뜰하게 왕겨를 모아 담았다. 왕겨는 겨우내 우리 집 땔감과 거름으로 썼다.
그날 저녁 우리는 묵은내 나는 정부미로 지은 밥이 아닌 햅쌀밥을 먹었다. 얼마만에 먹는 쌀밥인가. 들기름보다 구수하고 사카린보다 달았다. 맨밥만 먹어도 꿀떡꿀떡 넘어 갔다.
그날 밤, 마루에 놓인 쌀가마니를 보며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내일은 다른 친구들처럼 흰쌀밥 담긴 도시락을 싸갈 수 있어서 기대하면서.
지금도 햅쌀밥이란 말만 들어도 입안에서 단물이 샘솟는다.

<언니네 글밭>은 2017년 여러가지연구소에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글로 정리하고 소통하고자 글 씨앗을 뿌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입니다. 작은 책으로 출판한 언니네 글밭의 글을 콩나물신문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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