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 가운데 하나인 '청명(淸明)'이라는 말은 봄이 깊어가며 하늘이 맑아지는 시절을 의미한다. 다음 절기인 곡우까지의 보름을 다시 3등분하여, 맨 앞 기간인 초후(初侯)엔 오동나무에 꽃이 피고, 중후엔 종달새가 울며, 말후(末候)에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전한다.

우리 세시풍속(동국세시기)에는 이 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고, 이 불을 임금이 다시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주는데, 임금이 하사한 불이라 하여 사화(賜火)라고 하였다. 이를 다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옛 불을 끄고 사화를 받기 전까지는 불을 켜지 않았다고 한다.

해마다 계절이 바뀌고 절기를 대할 때마다 의미를 부여해 희망과 의지를 새롭게 한 조상의 깊은 지혜를 음미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이고 본받아야할 교훈이다. 노동의 힘겨움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극복해 자연의 이법을 수용하고 자연과의 친화를 통해 자연과의 동화를 추구한 슬기도 놀랍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편리와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연을 도외시하고 파괴한 결과로 커다란 문제와 재앙을 되돌려 받고 있다. 미세먼지가 생명을 위협하고 그 해답을 찾지도 못한 채 생활의 심각한 불편과 위협의 공포로 시달리고 있다. 자연은 늘 정직하다.

이에 더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더 정확히는 공직자에 대한 심각한 재앙으로 시름에 겹고 불만에 시달리고 있다. 공직(供職/公直/公職/龔直)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고 이제 관례나 상식, 일상이 되고 있음에 무기력을 넘어 슬프기까지 한 것이 필자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그다움’이라면 공인 역시 공인다워야 할 것인데, 중앙이나 지방이나 그 지방의 위탁을 받은 공적 기관들의 행태는 모두 ‘그다움’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잃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창업과 수성은 길고도 멀며, 어려움을 담보로 하고 인내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다움’의 간난(艱難)의 명성의 유지가 결국 인간의 의지라 할 때, 사명감의 상실이나 ‘그다움’에 대한 주체적 책임감의 진정성이 사라지면 그 결말은 자명해진다.

시민이, 국민이 지방, 정부를 우려하고 걱정해야 하는 지금은 분명 불행하고 불행이다. 삶은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그나마 ‘그다움’을 견지할 때 자연은 작고 소중한 기쁨을 아주 잠시만이라도 선사해온 선례(先例)를 살펴보면 익히 알 수 있다. 해서 공직(公職)은 공직(供職)의 의미를 ‘그다움’으로 인식하고, 공직(公直)으로 공직(龔直)함이 옳고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안으로 쌓이는 시민과 국민의 불만과 불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런 사화(賜火)를 미세먼지 속에서 숨을 고르며 시민으로서 애타게 기다려본다.

청명 때는 농사일을 준비하는 시기로, 논밭의 흙을 고르는 일이 시작된다. 청명에 날씨가 맑으면 농사나 어업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이날 날씨가 좋으면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기뻐하며, 이날 바람이 불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다움’의 국풍(國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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