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윤봉길의사, 일왕 생일 겸 전승 축하 식장(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윤봉길 의사 사진   (출처 국가 보훈처

선서문(宣誓文)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祖國)의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회복(回復)하기 위(爲)하야 한후국단(韓後國團)의 일원(一員)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盟誓)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국내와 연계를 도모하고, 애국공채를 발행하여 독립 우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또한 여러 외교 활동과 무장 투쟁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 연통제와 교통국이 와해되고, 초기 치중했던 외교 독립론의 성과가 미흡했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의 사상과 노선 대립이 심해서 임시정부는 점차 약화되어 간다. 결국 1923년 결렬된 국민 대표 회의 이후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남은 김구는 이후 임시정부 활동의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1931년 비밀공격 조직을 통한 주요인물 제거를 목표로 한인애국단을 설립하게 된다. 윤봉길 의사는 이봉창 의사와 더불어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2년 4월 26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는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를 기념하는 기념식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과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가지고 식장에 입장하여 폭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 등이 즉사하였고, 여러 사상자가 나왔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다음 인용 글은 김구가 훙커우 공원 의거 계획과 수행 방법, 윤봉길 의사와 한인애국단에 대해 설명한 글이다. 1932년 5월 9일 「The Truth of the Hongkew Park」라고 제목을 단 영문에 윤봉길의 의거 결행 전 촬영한 기념사진을 첨부하여 상하이 각 외국 신문 및 중국 신문에 투서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계획과 수행≫
 일본은 강력한 힘으로 한국을 병합하고 이어서 만주를 정복하고 나아가 이유 없이 상해(上海)에 침입함으로써 동양 및 세계의 위협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 평화의 적, 인도와 정의의 파괴자에 대해 복수할 결심을 한 것이다.
맨 처음 나는 이봉창을 동경(東京)에 파견하였고, 그는 1월 8일에 일본 황제를 습격했다. 이어서 나는 일본 군대 장관 등을 살해하기 위해 윤(尹)을 4월 29일 홍구공원에 보냈다. 나는 동경(東京) 사건의 상세한 내용은 다른 기회를 위해 보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홍구 사건의 전말만을 말하기로 한다.
 4월 29일 이른 아침 나는 우리 청년 동지 윤봉길 군을 불러서 내가 제작한 폭탄 2개를 그에게 주었다. 1개는 우리의 적인 일본 군벌을 살해하기---일본인 이외 어떤 사람도 다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위해, 또 1개는 행위가 끝난 뒤 그 자신을 죽이기 위해. 그는 내 명령을 수행할 것을 엄숙히 약속했다. 우리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악수를 나누며 이별을 고하고 다음 세상에서 만나기로 맹세했다. 나는 자동차를 빌려 그를 홍구공원으로 보냈다. 그는 몸에 단지 2개의 폭탄과 돈 4불(弗)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성공을 기원했다.
≪尹은 어떤 사람인가?≫
 윤봉길은 1908년 한국 예산(禮山)의 빈핍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현재 아직 생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처와 2명의 자녀가 있다. 그는 몹시 영리했으므로 괴동(怪童)이라 불렸다. 17세 때 그는 야학을 열어 빈농의 아이들을 5년간 가르쳤다. 그는 일본인의 경제적 및 정치적 압박이 한인을 밀어내어 파산과 죽음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았을 때 복수를 결심하고 집을 나왔다. 그는 상해(上海)로 가는 도중 돈을 다 써서 청도(靑島)에서 발을 머물러 그곳에서 중원겸차랑(中原兼次郞)이 경영하는 일본인 세탁소에서 일했다. 그는 여비로 쓸 만큼 돈을 저축하자 작년 8월 상해(上海)로 왔다. 그는 이곳의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공장의 부당한 대우를 혐오하여 공장을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홍구(虹口) 마켓의 채소가게에 고용되었는데 그 동안에 늘 좋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최근에 내가 있는 곳에 와서 한국의 구출을 논했는데 얼마 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이란 무엇인가?≫
 한인애국단이란 내가 애국자만으로 조직하고 또 폭력을 써서 한국의 구제를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지휘하는 단체인데 지고한 희생을 감수하는 자만이 단원이 될 수가 있다. 단원은 오로지 나만이 이를 지명하고 또 이를 용인하는 것으로, 단원은 서로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다. 또한 어떠한 회합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은 절대 비밀리에 거행된다. 우리는 적의 중요 인물을 암살하는 동시에 적의 집정기관을 파괴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해(上海) 출정군 사령관 백천(白川)과 싸울 수 있는 돈도 군대도 가지지 못했지만 그러나 일본인의 불가침 경비선을 돌파하고 맨손으로 그를 죽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또 훈련된 ‘인간’을 가지고 있다.     
                            출처 : 『백범김구전집』 제4권 대한민국임시정부Ⅰ, 569~5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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