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은 두보(杜甫)와 쌍벽을 이루는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그 시재(詩才)가 가히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그런 이백이 당나라 현종 14년(서기 755), 안휘성 경현(涇縣)에 있는 도화담(桃花潭)을 방문했다. 그를 초대한 왕륜(汪倫)은 시종일관 좋은 술과 안주로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엔 떠나는 그를 위하여 사람들과 함께 나루터까지 나와 답가(踏歌)를 부르며 전송했다. 답가는 여러 사람이 함께 발을 굴러 박자를 맞춰가며 부르는 이별가다. 두 사람은 평소에 전혀 알지 못한 사이였으나 이백이 도화담을 찾았던 것은 왕륜이 보낸 한 장의 편지 때문이었다. 왕륜은 당대의 대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이백이 안휘성 추포(秋浦)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볼 생각에 한 가지 기발한 꾀를 생각해낸다. 청나라 사람 원매(袁枚)가 쓴 『수원시화보유(隨園詩話補遺)』를 보면, 왕륜은 이백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선생께서는 산수 유람을 좋아하시오? 그렇다면 이곳에 십리(十里) 도화(桃花)가 있소이다. 선생은 또한 술을 좋아하시오? 그렇다면 이곳에 만가(萬家)의 주점(酒店)이 있소이다!”
 
왕륜의 편지를 받은 이백은 흔쾌히 도화담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록 이름 없는 시골선비일지라도 왕륜 또한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까닭에 만나자마자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 맛 좋은 술과 진귀한 안주 등,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세월 가는 줄 모르던 이백, 어느 날 그의 뇌리에 문득 왕륜의 편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십리 도화와 만가 주점은 어찌하여 보여주지 않는 것이오?”
 
이백의 물음에 왕륜이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도화담(桃花潭)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십리 도화는 바로 그곳을 일컬음이요, 만가주점 또한 만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술집이라는 뜻이니 이런 궁벽한 시골에 어찌 만 개나 되는 주점이 있겠소?”

왕륜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비로소 속은 것을 안 이백은 한참동안이나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자신을 속인 왕륜에게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를 실컷 먹고 거기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까지 얻었으니 그만하면 됐지, 화낼 일이 무어 있겠는가?
 
이백은 나루터에 나와 석별의 정을 토로하는 왕륜을 위하여 짧은 이별시 한 수를 지었다.
 
贈汪倫  왕륜에게 주다
 
李白乘舟將欲行  이 백이 배에 올라 막 떠나려는데
忽聞岸上踏歌聲  홀연히 강가에서 답가(踏歌) 소리 들리네
桃花潭水深千尺  도화담의 물은 깊이가 일천 척(尺)이지만
不及汪倫送我情  나를 보내는 왕륜의 슬픔에는 미치지 못한다네
 

도화담(사진출처 : 안휘성 인민정부망)

훗날, 이 시가 유명해진 덕분에 <도화담>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무명의 왕륜 또한 길이 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시에서는 시의 함축미를 중시하는 바, 송나라 때 엄 우(嚴羽)가 말한 ‘작시사기(作詩四忌)’가 곧 그것이다.
 
“단어는 직설적인 것을 피하고[語忌直], 뜻은 천박함을 피하며[意忌淺], 맥은 드러남을 피하고[脈忌露], 맛은 짧은 것을 피한다[味忌短].”
 
또한 청나라 사람 시보화(施補華) 역시 “직설적인 것을 피하고 완곡함을 귀히 여긴다[忌直貴曲].”라고 하였는데, 이 백의 시는 함축미가 적고 단어는 직설적이며 맥이 노출되었음에도 오히려 뜻이 천박하지 않고 음미할수록 맛이 우러난다. 또 시에서는 사람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게 일반적인데 이 시는 <이백>, <왕륜> 등의 실명을 사용했음에도 오히려 좋은 시로 명성을 얻었다. 비록 거칠기는 해도 꾸밈없이 진솔하게 마음 속 진심을 토로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는, 시창작의 역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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