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진 시인의 소년희만편지

상수(가명)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2년 전, 배달 아르바이트를 마친 상수는 친구 기훈(가명)이와 천호(가명)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가다 달려오는 자동차와 충돌했습니다. 상수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알바를 다했지만 끝내 살아남지 못한 것입니다. 천호는 식물인간이 됐고 기훈이는 두 달간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갓 스물, 청춘의 꽃을 피워야 할 소년들이 꽃보다 붉은 피를 아스팔트에 쏟으며 죽었습니다. 꽃 피지도 지지도 못한 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습니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병준(가명·19세)이는 배달대행업체에서 일합니다. 오후 2시에 출근해 새벽 1시까지 11시간 동안 30~40건 정도의 콜을 받아 피자와 치킨과 자장면 등의 음식을 배달해서 한 달에 200~250만 원 정도 법니다. 여기서 오토바이 수리비와 보험료 그리고, 기름 값으로 60만 원 정도 공제하면 150~200만 원 정도가 순수입입니다. 할머니에겐 매달 20만원을 드립니다. 할머니가 봄나들이 간다고 하자 여행 경비로 20만원을 드렸습니다. 병준이에게 할머니는 엄마입니다. 엄마는 어렸을 적에 떠났습니다.

병준이는 오토바이 배달을 한지 4개월 만에 열 한차례의 크고 작은 사고를 경험했고 세 차례나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생명보다 총알 배달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사고는 필연적입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배달부가 져야합니다. 병준이는 배달 건수에 따라 수당을 받는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에 산재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오토바이가 부서지면 수리비도 물어내야 합니다. 병준이를 보호해줄 안전장치는 별로 없습니다.

2015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2∼2014년 기간 동안 오토바이 배달하다 다친 19세 이하 청소년은 1303명입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다친 전체 4460명 가운데 29.2%나 차지했습니다. 2016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삼화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7년간 19세 이하 청소년 3042명이 배달 중 교통사고로 부상당했고 63명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청소년들을 누가 죽였을까요?

총알 배달을 이윤 아이템으로 삼은 피자 업체와 이를 부추긴 소비자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 피자업체가 30분 배달을 선포하자 다른 업체들은 경쟁에 뒤질세라 배달 시간을 20분~15분으로 앞당기면서 속도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 중에 죽은 군인에겐 훈장이 수여되고 국립묘지에 묻히는 등 예우를 갖추지만 배달 전쟁에 맨몸으로 던져진 배달 청소년들은 버려진 희생자일 뿐입니다. 아스팔트 위에 붉은 피를 흘린 채 죽어간 어린 목숨들은 보상도 예우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한줌 재가 되어 비인간의 땅을 떠났습니다.

 

"사고 무서우면 일 못해. 형이 돈 줄 거야!"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기훈이는 후배 병준이에게 배달을 그만두라고 만류했지만 돌아온 답은 생존 문제였습니다. 배달을 그만두면 할머니 용돈도 생활비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기훈이가 꼬리를 내린 것은 주먹이 센 병준이의 깡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부천역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의점 알바, 음식점 서빙, 결혼식 주차안내 등의 단기 알바를 하다 잘려서 백수로 떠도는 것에 비해 오토바이 배달은 고수익을 보장합니다.

부모 없이 자란 병준이는 열다섯 살 때부터 일했습니다. 컴퓨터 조립공장에서부터 시작해 각종 서빙과 배달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병준이에겐 꿈과 희망이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사치스러운 단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준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당면한 생존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버리고 떠났는데 누가 자신을 지켜줄 것인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병준이에게 정의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병준이가 가장 싫어하는 건 진상 고객입니다. 대다수 어른들은 어리다고 봐주지 않습니다. 금방 주문해 놓고 빨리 안 오냐고 재촉하고 화를 내고 조금 늦으면 주문을 취소하기도 합니다. 배달료 몇 푼 받으려다가 음식 값까지 물어내기도 했습니다. 반말하고 욕설하는 진상 고객을 엎어버리고 싶어도 할머니 때문에 참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소년원에 가면 할머니가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줄담배를 피웁니다. 분노를 참다가 눈물 흘린 적도 있습니다.

부천역 아이들은 알바 인생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아이들은 시한부 생명도 아닌데 시한부로 일하다가 잘립니다. 세상은 이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전단지 배포와 웨딩홀 알바를 한 민훈이도 시한부 알바였습니다. 돈이라도 제대로 받고 잘리면 그나마 덜 억울하겠습니다. 민훈이는 아르바이트 비용을 몇 번이나 받지 못했습니다. 부천역 아이들이 뒷골목에 모이는 건 어른들의 이런저런 횡포를 피해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부천역 아이들에게 안전구역은 별로 없습니다. 극빈․결손 가정에서 태어난 게 아이들 잘못이 아닌데 그 책임을 아이들이 져야했고, 엄마 없는 자식들이라고 손가락질 당해야 했고, 학교 밖으로 쫓겨날 때는 벌거숭이로 쫓겨났고, 거리를 떠돌 때는 알아서 생존해야만 합니다.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무한경쟁 시장에 던져진 아이들은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세상에 쫓기다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이 소년들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꽃이 핀다고 기뻐하고 꽃이 진다고 슬퍼합니다. 삶의 낭만과 휴머니즘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서로를 축복하며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이, 생존과 생계에 쫓기는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날 아이들이 아스팔트에 꽃보다 더 붉은 피를 쏟으면서 죽거나 다치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꽃이 지는 것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도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지는 어린 목숨들에겐 관심조차 없는 세상에 대해, 자기들끼리 행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잘 가라!
이 세상을 떠난 소년들아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마라.
너희들이 부서지고 다치고 죽어가는 데도
 지들끼리 희희낙락 피는 것은 것들은 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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