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여성의전화 활동가 디디가 생각하는 아주 간단한 도식.
평등 = 민주주의 = 더불어 돌보기 = 이것이 페미니즘.

 

2019년 기해년의 반이 가고 있는 지금 이때, 6월은 디디에게 가장 평온한 계절이다. 한해가 시작하는 1월을 지나 봄을 보내고 나서 이른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기까지 상반기는 늘상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정신없이 흘러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한해의 반을 통과하는 6월을 맞이한다.

6월에는 꽃이 많이 핀다. 햇볕도 적당하고, 바람도 좋고, 장마 시작하기 전에 내리는 빗방울도 좋다. 시절이 좋으니 내가 얼마나 좋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 좋은 삶, 좋은 사람에 대한 내용이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만나고서야 알차게 채워졌다. 나에 대한 직면, 젠더에 대한 문제없이 그려진 좋은 삶과 좋은 사람에 대한 이상은 팥 없는 붕어빵과도 같은 거였다.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타인과 동등한 관계에 있는가, 나의 재정 자립도는 어떠한가,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나는 타인에게 단호하게 말하는가, 나는 여성으로서 나 자신을 좋아하는가, 나는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가, 나의 문제 어느 부분이 차별에서 기인하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 문화에서 여성은 무엇을 하도록 사회화되었는지 자각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온전성을 믿는가, 나와 같은 여성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가, 또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나는 관계에서 나 자신의 성적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힘이 드는가, 나와 다른 여성이 자신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을 돕고 싶은가, 나는 여성으로서 나의 강점을 자각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가 등등의 질문들을 하면서 좋은 삶을 꾸리려고 하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상상을 한다.

 

 
 내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되고픈, 되려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완성되기 어려운 상상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을 삶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완성형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 가깝다.

 디디라는 이 이름은 두 번째 네팔 여행에서 얻어온 이름이다. 우리 동네 들장미가 만발하듯 랄리구라스가 만발한 때 다녀온 네팔여행에서 돌아와 나의 별칭을 ‘디디’로 정했다. 디디는 네팔에서 여성을 호칭할 때 높여서 부르는 말이라고 들었다. 낯선 여자를 그곳 사람들이 ‘디디’라고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순응하느라, 나 스스스로,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고, 응원하지 않았고, 감싸주지 않았기에 나에게 디디라는 새로운 별칭을 붙여주고 싶었던 거다.

 

 지금 6월 같은 때에 네팔에서 흐드러지게 피던 랄리구라스가 그립다. 한 일주일을, 언제나 하얗게 빛나는 산봉우리들을 보면서 걷고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걸으며 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어떤 페미스트로 살고 싶은가, 나는 나의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는 그토록 왜 어머니를 미워하는가, 왜 그 사람에게 유독 의존적인가, 나는 앞으로도 내 먹을 것을 마련해 나갈 수 있을까, 분명한 것들을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여성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높이 올라갈수록 호흡이 힘들어졌지만 그럴수록 내속을 들여다보기가 깊어졌고, 또 누군가가 그리워지곤 했다. 나는 나의 힘으로 살아가야하는 존재이지만 또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존재이라는 것을 오롯이 느끼곤 했다. 나로 살면서 또 더불어 살면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방법이 내가 정의하는 페미니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맨 처음 네팔 여행에서, 이제부터 페미니스트로 살아볼까, 다짐을 하면서 얻어온 생각이다.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모두가 소중하고 그 때문에 평등해야 하고 그래서 서로 돌봐야한다. 랄리구라스 닮은 장미들을 보며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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