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立秋)다. 입추답지 않은 폭염속의 햇볕 입추(立錐)다. 계절은 속임이 없는 것일까? 아니 자연은 거짓이 없을 수 있을까? 더위도 폭염도 자연일 것이다. 인간의 편리와 안락의 추구를 문명이고 문화라고 일컫는다. 도전과 응전을 갈파한 학자의 이론도 세월을 견디기 어렵게 됐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극복과 자연의 인간의 문명에 대한 버팀을 지금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더위에 골몰한다는 건 한심한, 일도 아니다. 흔히 입추 즈음은 잠시 농한(農閑)의 때이다. 하여 ‘어정 7월, 건들 8월’은 입추의 시기를 말한다.

‘어정과 건들’, 일에 정성이 없고 대충 얼버무림과 겉모양만을 꾸미고 내용이 없는 사람을 어정이라 한다. 건들은 싱겁고 멋없음은 물론 이리저리 흔들거림을 일컫는다. 요즘의 세태(世態)와도 흡사하다. 암팡지고 매몰차지 못한 안타까움이 폭염보다 더하다.

직설적으로 비유하자면 지금의 공직자와 서민의 모습이고 모양이다. 중심이 없고 정체성이 사라진 멘붕(mental collapsing, 멘탈 붕괴)상태는 아닐지 자못 의심스럽다. 옛적 서(恕)와 충(忠)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다. 서는 같음(如)과 심(心)의 합자(合字)이고, 충은 가운데(中)와 심(心)의 합자다. 모두 마음이 공통된 부분이다. 같은 마음과 중심의 마음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묻기를 평생을 두고 실천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자, 한마디로 답한 것이 서이다. 풀어보자면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말라는 이른바 ‘己所不欲 勿施於人’, 상대와 같은 마음이 되라는 뜻이다.

충은 마음의 중심, 다시 말해 ‘마음을 중심에 바로 세운다.’는 의미다. 자기관리와 성찰의 철저함을 말한 것이다. 충이 자신을 다스리는 반성적 철학이라면, 아마 서는 사람 사이에서의 실천을 요구하는 행동적 철학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내면은 곧 외면이고, 외면 또한 내면이다. 때문에 내/외면은 동체(同體)인 것은 아닐까? 더위를 상대적이라고 선조들은 말해왔다.

자연은 이법이라 인간으로서 이해와 숙지가 빠르고 쉽다. 자연은 자연이라고 이미 단정해온 무의식이 기존(旣存)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의 부딪침은 결코 이해를 넘어선다. 서와 충의 충돌이다. 공직은 그래서 충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공(公)은 그런 것이 자연이다. 자연이어야 한다. 공이란 숨김없는 드러냄이고 그 드러남이 그 거대한 의미이다.

요즈음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이 이야기도 화두(話頭)다.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진실이고 현실임을 어쩌랴! 민심은 천심이고, 천심은 자연이며 이법이다. 진실이 불편한 지금은 분명 자연도 매한가지일 터이니, 서와 충은 다른 둘이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가 될 것인가?

입추가 지나면 말복(末伏)이다. 말복이 지나면 과연 더위가 완전히 지났다고 여길 수 있을지 자연에게 물으면, 자연은 어떤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시절이 수상(殊常)하니 그 답 또한 이상(異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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