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덕은 인천 출신의 극작가다. 목포부청(木浦府廳)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목포에서 보내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국민학교)와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주로 금융 계통의 회사에 취직하던 친구들과 달리 함세덕은 경성의 본정통[현 충무로]에 위치한 서점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취직했다. 학창시절부터 품었던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다. 약 1년 동안 서점에서 일하면서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등을 알게 되고 이런 인연으로 1936년 최초의 희곡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한다. 이후 창작활동에 전념한 함세덕은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대회 참가작인 「동승(童僧)」을 발표하고,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海燕)」이 당선되며, 이듬해인 1941년에는, 「산허구리」, 「동승」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무의도 기행」을 발표한다.

 「무의도 기행」은 1930년대 후반의 어느 겨울 초입, 서해안의 작은 어촌 ‘소무의도(작은 떼무리)’를 배경으로 한다. 지금은 큰 떼무리와 작은 떼무리가 인도교로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는 나룻배로 오가던 시절이었다. 등장인물은 늙은 아낙 공씨(孔氏)와 그녀의 남편 낙경(落京), 아들 천명(天命), 공씨의 동생 공주학(孔主學) 부부, 한의사 구주부(龜主傅)와 딸 희녀, 뱃사람 등등이다. 공씨의 남편 낙경은 본래 강원도가 고향이지만, “염평(연평) 가서 조기만 잡으면 돈 벌긴 물 묻은 손에 모래 줍기”라는 소문에 휩쓸려 집 팔고 땅 팔아가지고 와서 작은 떼무리에 정착했다. 승승장구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재래식 목선에 의지한 어로방식으로는 신식 발동선의 그물질을 당해낼 수 없어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두 아들을 바다에서 잃었고 혼인날짜까지 잡은 외동딸은 그물 밑천으로 술집에 팔아넘겼다. 이제 남은 것은 막내아들 천명(天命)이 하나뿐, 한사코 배를 타는 것을 싫어하여 항구에 있는 일본인 가마보코[어묵]집 직원으로 취직시켰으나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극은 가마보코 집을 뛰쳐나온 천명이를 공주학의 중선 배에 태우려는 세력과 이를 만류하는 세력 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된다.

▲ 소무의도 포구. 한때는 조기사리, 민어사리, 동아사리를 위한 배들로 흥성스러웠을 것이나 지금은 작은 고깃배 몇 척만 한가로이 떠있다.

공씨 강원두서 숫(숯)이나 굽고, 강냉이나 닐구구(일구고) 있었으면 아무 일 없는 것을...염평( 연평)가서 조기만 잡으면 돈 벌긴 물 묻은 손에 모래줍기라구 하드니…….
낙경 (벌컥 소래(소리)를 질른다) 그 넋두리 고만 해.
공씨 (벌떡 일어서며 쏘아부친다) 집 팔구 땅 팔아 가지구 와서 작만(장만)한 게 뭐야? 큰놈 둘째놈 장가두 못 보내구 물에서 죽이지 않았어? 봉치(봉채)까지 받어논 다 큰 년을, 돼지새끼 팔아치듯 팔아가지구, 중선 미천(밑천) 찔러 넣지? 그래두 다 못해서, 인제 열일굽(열일곱) 먹은 막내둥이 하나 있는 걸 마저 잡아먹을려고? 못해, 못해, 못해. (미칠 듯이 규환(叫喚)을 치며) 또 송장두 못 찾게? 또 송장두 못 찾게?
낙경 저게 귀신이 썼나? 왜 악을 쓰구 이래?
공씨 또 갱변에 념하다 놓진(놓친)친 년처럼, 우둑허니(우두커니) 주저앉아서 송장 떠내려 오기만 기대리라구? 못해, 못해.

하지만 천명은 겨우내 굶주림에 시달려야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그물 밑천이 되어 술집으로 팔려나간 누이를 데려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른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가 탄 배는 동아[숭어]를 가득 싣고 항구로 돌아오던 중 모진 풍랑을 만나 파선하고 만다. 처음부터 불행한 운명을 부여받은 그의 주검은 부서진 널쪽에 몸이 묶인 채 멀리 해주항에서 발견되었다.

▲ 안산에서 바라본 소무의도인도교. 작은 떼무리 선착장과 광명항 선착장을 잇는 타원형 모양의 다리로 길이 414미터, 폭 3.8미터이다. 지난 2011년 4월에 준공했다.

일본의 갑작스런 경제보복으로 한일 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8월 중순, 소무의도를 찾았다. 예전 같으면 잠진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잠진도와 무의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겨서 교통이 훨씬 편리해졌다. 광명항에서 마을버스를 내리자 멀리 소무의도와 함께 푸른 바다 위를 가로질러 서있는 아름다운 다리가 시선을 끈다. 자동차는 건널 수 없고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소무의도 인도교다. 푸른 파도 위를 달리는 쾌속선의 하얀 물보라를 구경하며 다리 위에 오르니 저만치 앞에 아기자기한 모습의 소무의도 포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철마다 민어잡이, 조기잡이, 새우잡이 배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는 포구지만 지금은 서너 척의 작은 어선만이 옛 영화를 그리듯, 파도에 출렁이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서서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포구로 돌아오는 작품 속 천명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 소무의도 인도교에서 바라본 해상 풍경. 소무의도 주변 바다는 수심이 깊어 물빛이 푸르고 장쾌한 맛이 있다. 빠르게 질주하는 쾌속선의 물보라가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게 한다.

 노틀하라범 (입에 침을 튀기며) 아무튼 그때는 배에다 십오원 각수식(씩) 하는 광목을, 두 필이나 통째 풀어서, 칭칭 감구 푸장(포장)을 쳤었으니까…(딸곡질을 하며) 돼지를 다섯마릴 잡었구, 갈보를 열명을 불렀다면, 고만이지.(딸곡질)
옘평(연평)서 한바탕 두드려부시구, 봉죽(豊漁旗)을 물에다 질질 끌구 풍악 갖춰 떼무리루 들올 땐, 녜전(예전) 김종서(金宗瑞) 녀진(女眞) 치구 들오는 것보담 더 장했어, 구경꾼들이 인산 떼같이 들끓었거든.(딸곡질)
늙은 어부  참 중선이라는게 사내놀음이지.
노틀하라범  안 될랴면 조상 산솔 팔아넣구두 빈손 싹싹 비비지만, 걸리는 날이면 몇 만 원 잡긴 상치쌈에 식은 밥이지.(딸곡질)
키큰 어부  엠평에 천명아버지가 쓱 내리면 계집이란 계집은 다 몰려왔었어.
늙은 어부 주머니에서 돈을 푹푹 집어줬거든.

하지만 이 같은 호사도 잠시, 대규모 자본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의 고깃배를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어부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한 때는 여진족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김종서 장군보다 더 장했던 천명아버지의 기세도 급격히 꺾여 마침내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음의 바다로 내몰 수밖에 없는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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