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무의도는 면적 1.22㎢, 해안선 길이 2.5㎞의 작은 섬이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누리길을 따라 소무의도 최고봉인 안산 정상에 오르자 멀리 덕적, 영흥, 대부 등의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전망대를 겸한 정자, 「하도정(鰕島亭)」에 올라 잠시 흐르는 땀을 씻으며 푸른 바다와 그 바다 사이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바라본다. 한 때는 내게 고립과 단절의 표상이었던 섬이 이제는 어느덧 그리움의 표상이 되었다. 삶이란 어쩌면 저마다의 가슴에 섬 하나씩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만이 알고, 나만의 출입이 허락되는 섬, 그 섬에서 가서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으며 내 안의 참된 나를 만나고 싶다.

▲ 하도정(蝦島亭). 소무의도 최고봉인 안산 정상에 있으며, 하도정이라는 이름에서 이곳이 옛날에 새우가 많이 잡힌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도정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누리길을 따라 몽여 해변에 이르자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팔미도(八尾島)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학시절, 교련시간마다 ‘월미 팔미 섬을 감돌아 오대양이 통한 곳, 빛나리라 우리 학원은 〇〇대학교...’라고 목청껏 부르던 교가, 그 교가 속 팔미도가 바로 눈앞에 있다. 팔미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남서쪽으로 13km, 소무의도에서 동쪽으로 6㎞ 떨어진 무인 섬이다. 1903년 6월 1일, 일제가 러일전쟁에 대비해 세운, 대한민국 최초의 등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팔미도 등대가 불을 밝힌 이후 일제의 조선 침략은 더욱 노골화 되었고, 일본인들의 자본력과 기술력은 조선의 모든 산업을 빠르게 잠식했다. 함세덕의 희곡 「무의도 기행」에도 당대의 이런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 소무의도 몽여 해변에서 본 팔미도.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 1일 첫 불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

공씨의 남편이며 공주학의 매부인 정낙경은 한 때 조기장군, 새우장군 소리를 들을 정도의 서해바다를 주름잡는 어부였으나, 재래식 풍선(風船)과 그물로는 더 이상 발동기와 저인망, 건착망 등 신식 그물로 무장한 고깃배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 고깃배의 선주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고, 비록 조선인이라 해도 그들은 이미 일본인 중심의 새로운 어업질서에 편입된 사람들이었다. 어업조합이 생기고, 입찰, 경매 등의 새로운 제도가 생겨난 상황에서 자본력과 기술력이 부족하고 시대의 변화에도 둔감한 정낙경의 삶은 끝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주학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알고 거기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해가는 인물이다. 정낙경 대에 선주와 선원의 관계가 동업[同事] 관계였다면 공주학의 대에 와서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형태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정낙경의 대에는 풍어 때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된 선원들이 많았지만 공주학의 대에는 부가 선주에게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공주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카 천명마저 폐선 직전의 위험한 고깃배에 태우는 인물이다.

노틀하라범  그때 동사하든 눔들, 나 빼놓군 다 잘 됐지. 다 잘 됐어. (딸곡질이 작고(자꾸) 나옴으로 안을 向하야) 게서요?
젊은 어부  아무두 없나 본데요.
노틀하라범  (부엌으로 들어가며)정첨진 싸전을 내구 한쪽으로 돈노릴(돈놀이를) 하지, 황서방은 강화 가서 비단전을 냈다지 않나?
 (물을 한 바가지 떠들고 나와 꿀덕 꿀덕 마신다.)
키 큰 어부 칠성 하라버진(할아버지는) 먼우금다(먼우금에다) 땅 사지 않었어요, 웨? 이번에 수원 가는 철로가 생기자 륙전(6전)씩 주구 산 게 매 평에 이원오십전(2원 50전)식 올랐대요.
(중략)
직지사서 왔다는 어부 그런데 어떻거다(어떡하다), 천명아버지가 실패하셨나요?
노틀하라범  (담배를 한 대 피여물며) 다, 이 노틀하라범 말을 안들은 탓이지.
직지사서 왔다는 어부  아-니 웨요?
노틀하라범  사월에 옘평서 첫 둥을 보구, 칠월에 둘째 둥을 보러, 우리가 칠산(七山)을 들어가지 않었겠나? 팔도서 「내로다」 하는 그물안(그물주인), 배임잔 다 몰려왔었지만, 그중에서두 새우장군 조기장군 하면 떼무리 정낙경을 첫손 첬거든. 아, 쑥 우리가 들어가니까, 군산서 왔다는 나가사키(중선)가, 벌서 쟁기를 두 줄루 우리 어장에다 떠왔데 그려. 우리가 가만이 물쌀을 보니까, 조기떼가 그 쟁기 새루(사이로) 몰려 갈 것 같단 말이야. 이거 참 난처하드군. 천명아버진, 그 새루 떼를 쫒아가자구 하구, 난 위태하다구 하구, 한참 싱강일(실랑이를) 하다가, 천명이아버지 말데루 뚫구 가기루 했었지. 아니나 다를가? 그 놈들이 물속에다 데구리(底曳網)을 쳐놨데 그려.
직지사서 왔다는 어부  군산 가서 재판했다는 게 그 얘기군요?
노틀하라범  남의 그물을 왼통 망처놨으니 물어주는 수 박게(밖에).

몽여 해변의 조용한 카페에 앉아 왁자지껄 떠드는 극중 어부들의 넋두리를 상상해본다. 결국 천명은 외삼촌 공주학의 강요에 못 이겨 고깃배에 올랐다가 비명횡사하고 마는데, 천명의 이런 운명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사지(死地)로 내몰린 일제강점기 대다수 민초들의 암울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송도 신도시와 청라국제도시, 영종 하늘도시 등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어느덧 광복 74주년을 맞이하였음에도 이 땅에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의 일제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반발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이 가시화되고 있는 마당에 한 쪽에서는 아직도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하고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터져 나오고 있다.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몽여 해변. 팔미도와 함께 송도신도시, 청라국제도시를 조망할 수 있다. 사진 중앙에 우뚝 솟은 3층 건물이 ‘섬 이야기 박물관’이다.

 몽여 해변 한쪽에 우뚝 솟은 ‘섬 이야기 박물관’이 보인다. 수십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뚜렷한 아이템을 찾지 못한 채 방치되다시피 하여 전형적인 혈세 낭비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건물이다. 이 박물관에 함세덕 소극장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곳 소무의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 「무의도 기행」 뿐 아니라 「동승」, 「산허구리」 등 그의 대표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다면 한동안 우리 연극사에서 지워졌던, 함세덕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해결해야할 문제도 있다. 함세덕은 일제말, <낙화암>, <무영탑>, <묵경정(黑鯨亭)>, <추장(酋長) 이사베라>, <어밀레종>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고, 그런 까닭에 그의 이름은 지금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광복 후에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고, 1947년 무렵 월북해서는 <대통령>, <山사람들>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6·25 발발 직후 남하하던 중 폭발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해외문학파도 카프계열도 신파극계열도 아닌 정통 신극작가로 등단한 인물로, 스승 유치진에 못지않은 뛰어난 감각과 극작기법으로 우리 근대극을 한 단계 진보시킨 작가라는 평가 있는가 하면, 시류에 영합해 지조 없이 살다간 부나방 같은 인물이라는 혹평도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문득 그를 생각하면 남과 북 어느 체제에도 순응하지 못하고 남지나해 푸른 파도에 몸을 던진, 소설 『광장』 속 주인공 이명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우리 역사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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