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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òa Bình(호아빈)’ : 베트남에서 배운 ‘평화’산학교 9학년 베트남 평화기행
산학교 중등 생활교사 아미(이화)  |  leejelee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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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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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내동 청소년문화의집(이하 나래)은 매년 다양한 기행과 내용으로 청소년들과 많은 프로그램을 함께 하고 있다. 산학교는 작년부터 나래와 베트남 평화기행을 함께 하고 있다. 9학년(중3) 친구들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고 배운다. 아이들은 책에서 주지 못하는 배움을 기행을 통해 배우고, 만나고, 보고 느낀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무지했던 것에 대해 반성도 하고, 함께 슬퍼하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고민한다. 전쟁의 참상, 학살의 참혹함을 넘어 평화와 연대에 대해 배우고,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준비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송내동 청소년문화의집(이하 나래)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가게 되었다. 베트남에 가기 전, 책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공부하고 갔지만, 학살의 흔적이 있는 위령비 앞에서, 전쟁의 기록을 담은 박물관에서, 또 생존자 탄 아주머니를 통해 만난 전쟁의 아픔은 책에서 배운 것과는 달랐다. 현실은 더 참혹했고, 피해자들에게 더 없이 가혹했다. 아이들은 적나라한 기록 앞에, 진실 앞에 진심으로 미안해했으며, 함께 아파했다.

   
 

 평화란 무엇일까? 어렸을 때는 단순히 ‘싸우지 않는 것’ ‘갈등이 없는 상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평화’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진짜 ‘평화’인지 헷갈리고, 잘 모르겠다. 
 8박 9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오고 나서 아이들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우리나라의 태도에 화가 많이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기행을 마치면 잊어버리고 멈추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평화를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던 한 친구의 말을 듣고 모양과 방법은 다르지만, 이번 기행이 아이들에게 큰 배움으로 남는 것이 느껴졌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이신 탄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올 초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이 왔다며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한국의 대답은 “미안하지만, 조사할 수 없다.”였다. 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묻어두고 덮어두려는 한국의 태도에 아이들과 기행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해야 할까요? 내가 계속 해야 될까요?”

 오랜 침묵을 깨고, 탄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셨다. 우리의 대답은 “네.”였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진실을 알고자 하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고, 돌려놓으려 노력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기운을 내 달라고 탄 아주머니께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제야 웃으시며 우리를 안아 주시고,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실제 탄 아주머니께서는 아프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지지하는 마음을 받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는 이제 수면위로 올려 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바라봐야 할지는 어느 누군가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다.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기억하고, 책임져야 할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전쟁이 힘든 건, 전쟁 당시보다 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게가 아닐까.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학생들 이야기>
   
 
√ 창윤
베트남 민간인 학살 위령비 및 박물관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베트남 전쟁에 감춰진 슬프고 아픈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전쟁의 상흔을 조금이나마 기억하고 반복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애도와 반성의 마음을 갖게 됐다. ·····중략·····
나에게 베트남 평화기행은 의미 있고 재미있었던 유익한 시간으로 남을 것 같다.
√ 보윤
 민간인학살은 그저 처참했다. 선미 박물관 외부에 민간인 학살 당시의 군인과 민간인의 발자국이 재현 돼 있었다. 맨발, 군화. 무서웠다. 학살 당시가 상상 되는 재현이었다. 그리고 집 터 마다 위령비가 있었다. 그렇게 기록 해 놓은 건 처음 봐서 눈이 갔다. 집집마다 있는 위령비를 보니 ‘전쟁과 민간인 학살이 일상을 망쳐 놓았다.’ 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 일상의 모습을 보니 더 마음이 아팠다. ·····중략·····
 한국 사람들이 민간인학살에 대해 많이 알았으면 좋겠고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봤으면 좋겠다. 나 역시 관심을 끊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사과가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 은결
 베트남 평화기행에서 갔던 장소 중에서 선미 박물관에 갔을 때도 탄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도 너무 화가 나고 슬프고 끔찍했다. 한국군들이 그런 짓을 해놨으면서 고개를 들고 사는 것들이, 한국인들이 이런 사건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났다. ·····중략·····
 비록 이 기행이 희미해져 있을 때도 있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이 알리는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이번 평화기행이 한 면에서는 슬프고도 끔찍했던 사건의 발견이라면 또 다른 면에서는 즐겁고도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의 기행으로 기억될 것 같다.
√ 새나
 그 전까지 학살의 피해자, 생존자, 유가족 이라고 하면 힘듦에 처해 있는 모습, 고통 받는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탄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그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그저 학살의 피해자, 생존자, 유가족일 뿐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게 됐다. ·····중략·····
 선미 박물관에서 한국군의 사진을 봤을 땐, 큰 느낌이 없었다. 다른 사진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던 것도 있고 워낙 유명한 사진이라 많이 접해서 그랬다. 그런데 퐁니퐁넛 마을 위령비에 갔을 때, 그 작은 위령비를 마주하고 한국군 학살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 더 많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 잔혹한 행위가 일어난 전쟁에 참전해, 일부는 그 잔혹행위에 가담하며 벌어온 돈으로 만들어진 한국 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참배를 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말이 죄송하다는 말 밖에 없었다.
√ 정아
 여러 감정들을 느꼈지만 그 중 특히 마음에 남는 감정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이다. 평소엔 거의 느낀 적이 없던 새로운 느낌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이었다. 집단의 크기와 관련 없이 내가 속해있는 한 집단에서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으며 그 감정은 관련 위령비나 박물관, 희생자 분들을 만나며 더욱 커지고, 심각해졌다. ·····중략·····
 부끄러워서, 글로 표현해내기 어려워서, 글의 주제와 맞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다 적지는 못 했지만, 이번 기행에서의 나는 느낀 것도,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아마 그것들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일 “실천하기” 탄 아주머니와 들었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고 내가 무언가 하길 바란다. 아니 할 것이다.
√ 신영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탄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다. 한국인들에 대한 트라우마도 크실 테고 한국 정부에게 좋지 못한 답을 들으신 뒤인데도 우리에게 따뜻하게 말해주시고, 밥도 챙겨주시고, 안아주실 수 있다는 게 대단해보였다. 이렇게 대할 수 있을 때 까지 힘들고 긴 시간이 있었을 텐데, 우리가 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한국’ 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든 것이 떠오를 텐데도. 청원 답변을 듣고는 내가 국방부 장관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충일
 기존에 공부하며 배웠던 것과 가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그 당시에는 잘 실감이 안됐지만 이후 생각을 다듬으며 여운으로 남아 오래 가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선미 박물관에서 봤던 끔찍했던 사진들, 복구한 유가족의 집, 탄 아주머니를 만나 뵌 일, 위령비 방문 등 직접 보고 들으며 전쟁의 끔찍함과 잔혹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전쟁’ 하면 딱히 별다른 생각이나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 아영
 진실을 아는 것이 이렇게 마음속의 짐이 되는 것인 줄 몰랐다. 하지만 한번 알게 된 진실을 외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짐을 덜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익숙해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진실’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이 무게를 계속해서 체감하고 곱씹어보는 것이 내가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중략·····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새삼 걱정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위령비들 앞에 나는 누구로 서야 하나.’라는 고민이었다. 참전국이었던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이 전쟁에 마음 아파하는 한명의 사람이자 어느 참전군인의 가족인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땅을 밟아야할까. 누군가는 말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선택할 수 없었던 네 핏줄에 발 묶일 필요 없다고. 그저 그 전쟁을 안타까워하는 개인으로서 이 전쟁을 바라보고 그 앞에 서면된다고. 처음엔 그런 이야기들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행에서 한국군 민간인학살의 피해자이신 탄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제대로 느꼈다. 나는 가해국인 대한민국의 국민 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본의 아니게’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유로 커다란 죄책감이 느꼈다. 그저 개인의 눈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마 그런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부끄러움과 죄송함으로 억눌린 감정을 느꼈다.
√ 범준
 기행에서는 베트남 학살에 대해 중점적으로 돌아다니며 배우거나 했다. 좋았던 점은 기행에 대해 갈 곳을 먼저 조사하거나 공부하고, 팀을 나눠서 설명하게 해서 우리가 갈 곳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조사함으로서 그 장소에 갔을 때 더욱 자세히 확인하고, 이게 어떤 건지 등등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 들살이는 내게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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