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샘바람 같이 차가울 듯 온기 일듯 사랑을 부른다. 여인이 두른 스카프다. 잘 갖춘 스카프의 연출은 사랑스런 도발이고 센스 있는 멋 내기다. 섹시의 절정을 이루게도 하고 단아한 여인이 되게도 한다. 남자의 시선엔 함부로 잡아 챌 수 없는 감질 나는 유혹이기도 하리라. 스카프 자락에 입맞춤을 하고 세레나데를 불러 주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지 않을까.

여행 중에 스카프를 샀다. 오월 감잎처럼 결이 빛나는 실크스카프를 사고 싶었으나  겨울 한복에 어울릴법한 스카프를 샀다. 직조의 우수성을 증명하느라 못에 끼워보며 큰 눈을 굴리는 중동 남자들의 상술에 넘어가긴 했지만 애장품 목록에 올리며 겨울 한복에 어머니의 품새처럼 단아하게 두를 날을 가늠해 본다.

외출을 서두르는 아침. 먼저 채비를 끝낸 남편이 스카프를 다림질 한다. 길고 구김이 심한 스카프를 다리질하는 손길이 신중하고 섬세하다. 딸은 남자 친구가 생기면 이 모습을 말해주고 싶단다. 스카프를 다려주는 아빠여서 엄마는 행복한 여인이라고. 시간에 쫓겨서 부탁한 다림질에 남편이 후한 점수를 땄다. 한 술 더 떠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는 나를 보고 눈을 찡긋한다. 그래요 행복합니다. 스카프를 다려준 남편 덕에 하루가 사푼거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면 스카프를 사는 편이다. 남자의 스카프를 고르는 일도 재미지다. 겨울 코트에 길게 걸쳐질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양복 깃 속에 보일 듯 말듯 두른 스카프도 멋져 보여서다.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하는 선물이지만 남편 것도 꼭 산다. 미안하지 않으려고 하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긴 모직 스카프도 사고 양복 깃 속에 두를 잔잔한 체크무늬 실크 스카프도 샀지만 편리성만 강조하는 남편은 짧은 모직 스카프만 고집한다. 한 번도 해보지를 않으니 내가 가질 수밖에.

긴 모직 스카프를 롱 코트에 두르니 그 멋도 괜찮다. 갈색 체크무늬 스카프는 바바리 속에 두르니 마치 성숙하고 차분한 여인이 된 듯 멋스럽기도 하다. 스카프에서조차 남녀 구분을 굳이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아 여야 색깔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깬 것 같기도 하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두른 스카프는 진주귀고리보다 눈길을 끈다. 모나리자처럼 도드라진 이마 위로 두른 스카프는 멋을 부린 것 같진 않지만 그녀를 매혹적이게 하는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선 하녀가 화가의 요구로 부인의 진주귀고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스카프를 두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화가와 하녀 간에 사랑의 기류가 읽히는 장면이지만 신분차이로 고백할 수 없는 사랑을 대변하듯 남의 진주귀고리보다 구김살 많은 그녀의 스카프가 도드라졌다.

산문낭독을 할 기회가 있었다. 지인이 가슬가슬한 흰색 천에 검정 테를 두른 스카프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메어준다. 검정 투피스에 날개 큰 흰나비가 날아갈 듯 맵시가 났다. 관객 중 한 분은 산문낭독도 좋았지만 의상상을 줘야 한다면 단연 베토벤 같은 흰색 스카프를 맨 사람이라고 했다. 가슬가슬한 천 때문에 며칠 동안 접촉성 피부염으로 곤혹을 치르긴 했지만 스카프 한 장의 연출이 낭독의 분위기에 걸맞았다는 것이리라.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스카프를 쓴 라라가 떠오른다. 17세의 어린 소녀가 황금색이 박힌 망사 스카프를 둘러주는 남자로 인해 불행이 시작되나, 지바고와의 운명 같은 사랑은 대기 중이다. 러시아의 내전이 불러 온 블랙홀 같은 사랑에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지바고와 라라. 불륜이 그토록 아름다워도 될까. 겨울만큼 차갑고 숨이 멎는 이별을 안겨버린 라라의 스카프는 추억처럼 선연히 남아 있다.

지척에 블랙홀이었던 사랑은 죽어 가는데 팔랑대는 그녀의 작업용 스카프는 어쩜 그리도 무감각하던지. 총총히 걸어가 버리는 라라를 향해 손만 뻗다 쓰러지는 지바고. 그의 눈빛이 애처로워 영화 속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돌려세우고 싶었다. 검정 스카프를 두르고 지바고의 무덤을 찾아 온 라라의 치명적 아름다움에 사랑을 느꼈다는 지바고 지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말았으니 스카프의 매력은 사랑에 민감하다고 볼 일이다.

눈이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다. 검은 방한복에 남색 모직 스카프를 둘렀다.  채도가 낮은 날의 도발이다. 립스틱을 바른 듯 기분이 밝아진다. 나보다 나를 더 많이 보는 이들의 시선이 남색만큼 밝아지기를. 눈이 내리면 털어내고 싶지 않을 만큼 조화롭기를 바라본다.
눈이 오면 잎샘바람 같은 스카프로 사랑을 불러 온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고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를 읽어야만 겨울나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다.
 
 

 
최숙미
경남고성 출신
수필가, 소설가
2010년 계간≪에세이문예≫수필로 등단
2018년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소설≫ 단편소설로 등단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중부지부장
한국문인협회부천지부 편집위원, 부천신인문학상 운영위원
수필집≪칼 가는 남자≫ ≪까치울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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