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1936)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La Casa de Bernarda Alba)>은 두 번째로 남편을 잃은 베르나르다가 다섯 딸에게 애도와 정숙을 강요하며 생기는 갈등을 그린다. 이 스페인 작품이 극단 노뜰의 <베르나르다>로 다시 태어났다. 김현우가 재창작하고 원영오가 연출한 이번 공연은 인물의 감정을 장중하게 끌어올리고 무대 위의 이미지를 보석처럼 세공했다.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과감한 구성이 돋보인다.

하녀 뽄시아와 베르나르다의 딸 마르띠리오는 남자 배우가 연기한다. 둘 모두 남자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여자라고 생각한다.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극단 노뜰은 남자가 둘 있지만 ‘여자들뿐인’ 역설적인 상황을 만듦으로써 이 집이 필요로 하는 남성 혹은 남성성의 결핍을 도드라지게 한다. 마르띠리오가 엄마 베르나르다에게 ‘남편을 잃은 슬픔만은 아닐’ 거라고, ‘아들을 잃고 딸을 얻은 슬픔’도 있다고 말하는 시적인 대사에 이어 무대가 어두워지고 베르나르다를 비추는 빛은 더 강해진다. 그녀가 ‘엄마~’라고 울듯이 외친다. 베르나르다 또한 누군가의 딸이며 그 모녀관계에서 지금의 강박이 생겨났다는 걸 알게 하는 장면이다. 베르나르다는 둘째 남편이 죽은 후 7명의 남편이 있었던 엄마처럼 살게 될 거라 예감한다. 남자들의 연이은 죽음. 이제 이 집에 수컷이라곤 말 한 마리 뿐이다.

그마저도 다쳐서 뛰어다닐 수 없게 됐다. 셋째 아멜리아가 둘째 막달레나를 집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을 불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막달레나와 아멜리아는 쌍둥이로 나오는데 이 또한 원작에 없는 내용이다. 쌍둥이라는 장치는 막달레나와 아멜리아의 애증 관계를 강화하기에 효과적이었다. 원작에서 수컷 말을 암컷들과 분리시키는 것을 공연에서는 다치게 하고, 원작에서 앙구스띠아스가 간직한 로마노의 사진을 마르띠리오가 훔치는 것을 공연에서는 돈이 필요한 막달레나가 진주반지를 훔친 것으로 바꾸고, 원작에서 뽄시아가 아델라에게 앙구스띠아스는 아이를 낳다가 곧 죽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을 공연에서는 마르띠리오가 아델라에게 말하는 것으로 바꾸는 등 <베르나르다>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과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재창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살아난 것은 베르나르다의 슬픔이다. 베르나르다가 딸들을 억압하는 꽉 막힌 모성으로만 그려지지 않도록, 공연은 인물의 이면에 여성으로서 거쳐 온 지난한 세월이 있음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의 엄마를 보고 역으로 배운 것, 즉 마을 사람들이 남의 집 일에 대해 수군덕거리는 분위기 안에서 여자가 얼마나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슬픔은 집밖에서 이해받기 어려워 안으로 숨기고 삭여야 하는 동시에 집안 여자들이 정숙하다는 것은 밖에 전시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공연의 후반에 이르자 딸들 모두 자신의 사랑과 결혼, 집에서의 탈출에만 골몰하느라 아무도 베르나르다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억압받는 딸들의 입장에서 공연을 지켜보다가 무대 한가운데서 객석을 바라보는 베르나르다의 망연자실한 눈빛에서 그간 몰랐던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남편을 잃었는데 딸들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 위로의 말이 없다. 그녀의 슬픔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딸들이 아니라면 관객들이.

“슬픔을 데려와…… 밖에 우리 집안의 슬픔을 두지 말자…….”

베르나르다가 물이 차오른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뽄시아에게 하는 말이다. 조명에 반사된 물 그림자가 오정아트홀의 천장에서 일렁인다. 이 장면은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처절하다. 베르나르다라는 인물을 한 대사로 소개한다면 내 귀에 박혀 떠나지 않는 저 대사가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딸들을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이지만 그 심층에는 슬픔을 집안으로 들여놓아야 하는 아픔이 있다. 무대 뒷벽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검은 물그림자처럼 이 곳은 베르나르다에게 캄캄한 우물. 그곳에서 울렸던 총성은 슬픔을 쏘아올리는 예포처럼 느껴졌다.

첫째딸 앙구스띠아스, 넷째 마르띠리오, 막내 아델라의 목을 연이어 휘감은 붉은 실은 청년 로마노를 사랑하는 자매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상징한다. 이밖에도 의자의 크기로 베르나르다와 딸들의 관계가 시각화되며 무대 바닥에 차오른 물은 인물들의 감정상태와 함께 흐르며 흔들리고 솟구친다. 배우들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장면은 절제돼 있다. 공연의 어느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도 인물들의 관계가 보일만큼 동선이 깔끔하다. 배우들의 발성 또한 절제돼 있는데 특히 베르나르다의 경우, 절제 안에서 오히려 인물의 감정 상태가 객석에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또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작은 음량으로 들려오는 음악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며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조명, 의상에 이르는 공연의 모든 요소들도 섬세하게 조율돼 있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오정아트홀의 계단참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장총만 없다뿐이지, 우리집이랑 똑같네!’ 어느 관객들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독립과 결혼이 늦은) 딸들의 입장에서 이 공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맞다. <베르나르다>가 이 시대에는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다. 배우가 떠난 무대에는 베르나르다의 의자와 딸들의 트렁크, 장총 한 자루, 그리고 고요해진 물이 남았다. 그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을까.

 

필자소개
김해진 공연비평가
1979년 서울 생. 제4회 플랫폼문화비평상 공연 부문 당선.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문학․비평․ 연구 부문 4기 입주예술가. 최근 글로 <고성오광대가 인형이 됐다!> <차가운 시선> 희곡 <마지막 짜지앙미엔>이 있다.
haejinwill@gmail.com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