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본능은 공포와 본능으로 나누어지는 단어다. 두려움과 무서움에 대한 본능은 생물보다 동물의 심리적 감정과 관계가 깊다. 근거가 없거나 미약해 대처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감정은 두려움(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으로 일이 일어나서의 초기 증상이고, 무서움(위험이나 위협에 처해 마음에 두렵고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과정상에서의 한계에 대해 일어나는 사후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목숨이 천명을 다할 때는 공포가 경험에 의거하거나 연습이 불가해 그 감소적 효과를 흔히 종교가 대신해 왔다. 이름 하여 ‘천국’과 ‘서방정토’ 등 사후가 안락하다고 가르치고 경전이 주입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이승에서의 業報가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는 교훈은 자못 이유가 있어 설득을 지녀왔다. 살아서의 공포의 양가적 수용이고 마음의 능동적 수련이다.

이에 반해 무서움이 앞서는 공포는 이유를 알 수 없고 갑작스런 위협으로 대처가 불가능한 경우를 들 수 있다. 결과로서의 죽음도 그렇고 근원이 불분명한 불안도 깊어지면 공포를 불러온다. ‘코로나19’라고 명명된 疫病이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요즈음 공포가 공포를 더해 가고 있다.
대처할 약도 없고 임상도 미약한 가운데 그저 경험에 의한 개인청결을 강조할 뿐인 것이 더 공포를 깊게 한다.

인명은 在天이라 하지 않던가. 지금은 하늘에 답을 물어야하는 인간의 가장 나약한 시간이다. 그저 병의 진원지가 특정하다고 강변하는 그것도 가진 것 없는 경험으로의 牽强附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급속한 확산이 너무 놀랍지 않은가. 아주 추운 극지에서도 동상에 걸리지 않고, 아주 더운 여름에도 속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앙은 늘 희생을 동반한다.

국가를 질타하는 이유는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국민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모르면 우선 잘 살펴야하는 데 정부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 권력이 높을수록 현실과의 괴리는 멀고 넓다. 그저 보고나 받고 짜여진 각본 회의가 고작이다. 결과는 헛소리이거나 딴소리로 나타난다. 公憤의 이유다. 이 시대의 진정한 爲民御使가 없는 건 국민의 커다란 불행이다.

삶이 개인의 책임으로 인식될 때 공권력의 기강과 질서는 붕괴가 시작된다. 원인에서 멀어진 감정적 대응으로 강제하려는 공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건 명분이 없어서임을 자인하는 속임수다. 하여 불신의 강은 거센 물결의 激浪을 만날 수밖에 없다. 주제에서 벗어나고 멀어질수록 變種된 공포가 화를 더한다. 관계자들의 허둥(어찌할 줄을 몰라 갈팡질팡하며 몹시 급하게 서두름)과 빈둥(별로 하는 일 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염치없이 놀기만 함)으로 분주한 野壇法席을 날마다 본다. 이른바 ‘가보지 않은 길’이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하는 자와의 사이에 국민은 고달프다. 守城의 끝없는 이유와 爭取를 위한 넘치는 핑계를 목숨으로 감당해야 하는 국민은 국민이 아니고, 정부는 정부의 존재이유를 포기한 것이나 같다. 어디다 대고 외쳐야 하고 누구를 향해 울어야 하는지가 분명한 이번 ‘코로나19’의 재앙은 결국 개인의 몫임이 분명해졌다. 이제 국민이 국가를 걱정하던 시대가 저물고 국민 각자가 헤쳐 나가야 할 獨自生存의 시절이 다시 공포스럽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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