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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로의 여행 – 시인 유미애유네스코 문학 창의 도시 지정 3주년 및 ‘2020 문화도시’ 지정 기념 특집 부천의 예술가 5
이종헌 조합원  |  h2on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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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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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신문은 부천시의 유네스코 문학 창의 도시 지정 3주년 및 문화체육관광부 ‘2020 문화도시’ 지정을 기념하여 <부천의 예술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부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각 분야의 명망 있는 예술가를 소개하는 이번 연재를 통해 부천 시민의 자긍심과 문화도시 부천의 위상이 한층 높아지기를 기대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인가? 겨울도 다 끝나갈 무렵, 하얗게 눈이 내린다. 눈아, 펑펑 쏟아져라. 펑펑 쏟아져 무릎 높이만큼, 아니 어깨높이만큼 쌓여다오. 그리하여 나무도 눈에 갇히고, 새도 눈에 갇히고, 매서운 바람마저 눈에 갇힌 절대 고독의 시간과 마주하게 해 다오. 그때가 되면 나는 따듯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느 여류시인의 시집(詩集)을 다시 펼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빚어놓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변두리 주민의 고단한 삶, 시 「고강동의 태양」

  <부천의 예술가> 시리즈 다섯 번째 주인공은 유미애 시인이다. 그녀는 1995년 등단과 함께 부천 문인협회 회원, 부천 여류문인협회(현, 부천 여성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해온 26년 차 베테랑 시인이다. 2004년, 「오쇠리 나팔꽃」, 「고강동의 태양」 등 5편의 시로 『시인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중앙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2010년, 첫 시집 『손톱』을 출간했고, 2019년, 두 번째 시집 『분홍 당나귀』로 제6회 풀꽃문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유미애 시인의 시 「고강동의 태양」은 과거 팔구십년대 부천시 고강동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도시 빈민들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 흔히 ‘부천’ 하면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않게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구성, 표현 등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돋보이는 작품이 바로 「고강동의 태양」이다. 과거 고강동은 서울이라는 ‘꿈의 도시’를 기점으로 그곳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의 절망과 새롭게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마구 뒤엉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던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태양과 두 개의 달이 있었다. 누구는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처럼 부푼 꿈을 안고 살아갔지만, 또 누구는 그믐달처럼 쪼그라든 희망을 붙들고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시 「고강동의 태양」은 그 중의 후자 즉,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도시 빈민들의 비극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푸르고 붉은 지붕들 태양연립 은하슈퍼
바람 돌아가는 모퉁이 금성여관 턱밑에는
노인이 꽝꽝 못 박아 걸어둔 전구가 있다
560번지 사람들은 그 아래서
부고장이나 밀린 고지서 등을 읽는다
바람 속에 한숨 넣어주며
비행기들이 낮게 나는 하늘 한 쪽
새들과 같은 방을 쓰는 노인을 보고 개가 짖는다
저 울음을 따라 흘러가고 오던 빛들
그을린 얼굴의 해가 천정으로 숨어들면
잠시 벗어놓은 어깨의 푸른 멍울이
별 대신 뜨는 이 곳, 02호
지하방에 서식하는 내가 어둠을 퍼올릴 때도
전구는 얼어붙은 길을 풀어내고 있었다
떠나 있던 새들이 빈 방으로 모여든다
일성전기 전깃줄에 감긴 사십 년 시간을 지나
복지회관 쪽방에 남은 박노인 눈 속의
일렁거리는 불빛, 그 등 앞세우고 노인은
70년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뒤를 따랐다
손에 든 부고장에는 지상에 없는 주소가 적혀 있다
누군가 그리우면
사람들은 달은 두고, 금성여관
턱 밑에 달랑거리는 전구를 바라본다
-시 「고강동의 태양」 전문-

  위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관찰자인 동시에 ‘02호 지하방에 서식하며 어둠을 퍼올리는’ 560번지 주민의 일원이다. 모든 시의 화자가 반드시 시인 자신일 필요는 없지만, 이 시에서만큼은 화자를 시인 자신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가 값싼 온정주의에 빠지지 않고, 과거 팔구십년대 개발지상주의에 밀려 변두리로 내몰린 도시 빈민들의 어두운 삶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이른바 시적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유미애 시인은 벌써 30년 가까이 때로는 세상과 싸우고 때로는 자기 자신과 싸우며 고강동에서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예술과 현실 사이, 시 「분홍 당나귀」

  유미애 시인의 시는 대체로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위의 시 「고강동의 태양」처럼 쉽게 읽히는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아는 일상의 어법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대할 때면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의 망망대해나 히말라야의 눈 덮인 설산에 홀로 내던져진 듯한 아득함을 느낀다. 그곳에는 표지판도 없고 방향등도 없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고봉 준령을 넘지 않고서 어찌 산을 논할 수 있으며, 태평양의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지 않고서 어찌 바다를 논할 수 있으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는 조지 맬러리의 말처럼 우리는 시가 거기 있기 때문에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유미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 「분홍 당나귀」는 제목부터가 파격적이다. 당나귀가 시인 자신을 의인화한 것이라는 사실 말고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게다다 ‘분홍’이라는 수식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선뜻 이해가 어렵다. 분홍 당나귀의 실체를 파헤쳐보기 위해 유미애 시인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평소 그녀의 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김성배 시인–그는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작가이다.-을 포섭하여 고강동 선사 유적공원 근처의 작은 찻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요즘 유행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얘기며, 부천의 그 많은 도서관과 서점에서 부천의 작가들 책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얘기며–유미애 시인의 경우도 상동 도서관에 시집 『손톱』 한 권 있는 게 유일하다. 교보문고, 알라딘 등에서도 그녀의 시집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늘어놓다가 본격적으로 분홍 당나귀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내가 분홍 당나귀의 뜻을 물었을 때, 그녀는 내게 시를 몇 번이나 읽었냐고 되물었다. 내가 겨우 한 번이라고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적어도 백 번쯤은 읽고 나서 질문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그리고는 난데없는 파교심매(灞橋尋梅) 이야기를 꺼냈다. 파교심매란 당나라 때 시인 맹호연

   
 

(孟浩然, 689~740)과 관련된 고사이다. 그는 평생 유량과 은둔생활을 하며 술과 가야금을 벗 삼아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른 봄이면 매화를 찾아 당나귀를 타고 장안에서 파교(灞橋)를 건너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나곤 했다. 맹호연이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으러 간다는 뜻의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는 조선 시대 화가들이 즐겨 그린 것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심사정(沈師正, 1707 ~ 1769)의 그림이다.

나는 심사정의 파교심매도를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머릿속이 밝아지면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맹호연은 가난한 선비다. 하지만 그는 이른 봄이면 당나귀에 술과 거문고를 싣고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아 떠난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은 생리적 욕구와 충돌한다. 가난은 현실이고 매화는 이상이다. 그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파교가 있다. 그림 속 맹호연은 당당하게 파교를 넘어 매화를 찾으러 떠나지만, 현실 속 시인은 ‘산경山經 해경海經, 괴기 발랄한 그 어떤 이야기에도 미혹되지 못한 채, 파지와 고지서가 얽힌 방’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렇다면 분홍이라는 수식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가난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매화라는 심미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시인의 슬픔과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색깔이 아니겠는가?

  시인 백석은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이 밤 유미애 시인과 함께 붉은 당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으러 떠나보련다. 눈아, 펑펑 쏟아져라. 펑펑 쏟아져 무릎 높이만큼, 아니 어깨높이만큼 쌓여다오.

옆모습에 관한 전설 하나 들려줄까?
내 왼쪽 얼굴은 이야기꾼이었지
청중이 던져주는 꽃을 뜯어 먹으며
갈채라는 날개를 퍼덕이며 조금씩 날아올랐지
별에서 별로 옮겨 가는 주인공과 낭만적인 문장들
그러나 빈 화병이 뒹굴 때면 그믐달처럼 희미해져 가는
반대편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 흘렸지
어느 바람 부는 저녁
목젖을 빠져나온 글자들이 입술 밖으로 뛰어내릴 때
그는 새로운 꽃을 찾아 떠났지
거문고를 메고 파교를 건너, 겨울 골짜기를 헤맸지
마침내 늙은 나무 아래 닿아 거문고를 탈 때
오색 고깔에 필묵을 든 달이 봉우리 위로 솟아올랐지만
긴 혀를 접으며 그가 다리를 건너오고 말았지
벌름거리는 코와 만단설화를 잃어버린 이 행성이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 내 오른쪽 얼굴이
꽃씨 대신 얼음 조각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홀쭉한 그 뺨의 수수께끼가 이야기의 시작이었으니까
파지와 고지서가 얽힌 방 나른한 연필 끝으로 돌아와
제 그림자를 밟고 있는 분홍 발굽, 면할 수 없는 내 죄는
산경山經 해경海經, 괴기 발랄한 그 어떤 이야기에도 미혹되지 못한 것
다시 바람이 부네
-시 「분홍 당나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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