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시작 혹은 초여름을 뜻하는 입하가 지났다. 곡우에 시작한 못자리 돌보기 등으로 바빠지는 농번기의 본격적인 시작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보리가 익을 무렵이라는 의미에서 맥추(麥秋), 맥량(麥涼)으로도 일컫는다.

풍속에는 앵두가 익고, 죽순이 올라오고 과일들이 새롭고 채소가 풍부해 보신의 기간이라 하는데 삶은 계란은 심장에 좋고 죽순은 다리를 튼튼히 하며 완두콩은 눈에 좋다는 중국의 속설도 전해온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논에서 개구리가 짝을 찾아 울고 못자리에는 벼의 싹이 자라기 시작하며 보리가 익기도 한다. 어린 쑥을 쌀가루와 섞어 버무리를 해먹었다고도 한다. 입하 전후의 차(茶)를 ‘두물머리’라고 하는데, 보통 곡우 전의 ‘우전차’가 가장 좋다고 하지만 초의(艸衣)선사는 입하 전후의 차를 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내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논길에서 울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겹고 서러움으로 남아있다. 물가 가까이까지 다가가면 울다가도 개구리는 울음을 멈춘다. 신기하기도 해서 잠시 동안 멈추어 서면 다시 울음을 시작한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울음은 더욱 커지고 뚜렷해진다. 풍경과 소리의 협연(協演)이기도 했다.

사전에서 개구리 울음을 찾아보면 개구리가 우는 것처럼 시끄럽기만 하고 쓸모없는 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의미가 없어 소음으로 들리고 불평을 야기하는 부정적 인식이다. 하지만 개구리의 울음이 짝을 찾는 애원(哀願)의 연가(戀歌)라는 사실이라면 이해가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불행하게도 절실한 대상을 향한 울음이 사라진 시대다. 울음은 감정의 극한에 나타나는 인간의 본원적 정서다. 그것이 간절한 요구와 희원(希願)의 발로라면 더욱 안쓰럽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가 필요한 것은 각자의 건강을 위한 배려라지만 그를 이유로 인간적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기우(杞憂)이길 바란다.

지금 개구리 울음을 들을 수 없는 시절에 왜 청개구리의 울음이 떠올랐을까. 이른바 청개구리전설이기 때문이리라. 이 설화는 비가 오려고 할 때면 청개구리가 운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효(孝)를 주제로 한 설화로서 말 안 듣는 아이를 ‘청개구리 같다.’라고 하는 비유이지만  오늘의 나를 지칭하는 것과 같아 더욱 가슴이 아리다.

코로나19로 만날 수 없는 구순의 어머님은 병상에 누워 그래도 불효막심한 자식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정 인간적 거리가 되지 않기를 애달파하는 어버이날을 지나며 더욱 가슴 저린 이유이다. 비 내리는 이 저녁 들리지 않는 개구리 울음으로 슬퍼지는 건 나이 듦의 징후일 것이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