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과 함께 서울 강북구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있는 공초 오상순의 묘를 찾았다. 지하철 4호선 수유역 3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3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옛날 궁녀들이 빨래도 하고 휴식도 취했다는 속칭 빨래골이 나온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빨래골공원지킴터’가 보이고 이를 지나 ‘백암 배드민턴장’ 삼거리에서 ‘칼바위공원지킴터’ 쪽으로 약 2백여 미터 되는 곳에 ‘공초 선생의 묘소’라는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다시 백여 미터를 이동하면 산 안쪽으로 녹슨 철책에 둘러싸인 초라한 무덤 하나가 보인다. 바로 공초 오상순의 묘다.

▲ 묘소 입구에 있는 표지석. ‘공초 선생의 묘소’라고 쓰여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요.”

  K형이 녹슨 철책을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젖혀진 철제 출입구를 지나 묘역 안으로 들어서자 무덤 위에 잡풀은 우거졌고 사방을 에워싼 철책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부식이 심했다. 그래도 봄을 맞아 나무엔 새순이 돋고 봉분 한쪽에 보라색 꽃이 피어올랐다. 무덤 앞에 반듯이 놓인 상석이며 사각형의 비석과 석등(石燈), 돌을 파서 만든 재떨이 등, 없는 것 빼고 갖출 것은 다 갖췄다. K형은 상석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놓고 가벼운 목례를 올렸다.

  “평생을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자유인으로 사신 공초 선생께서 이렇게 비좁은 곳에 갇혀계시자니 답답도 하겠습니다?”

  “본래는 철책이 없었고 입구에 주점 비슷한 초가가 하나 있었는데 곱상한 외모의 나이 지긋한 여인네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공초 선생이 대구에 잠시 내려가 계실 때 동거했던 여인이라는 얘기도 있고, 또 생전에 선생을 흠모했던 여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예전에는 공초 선생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꽤 많았던 모양인데 정화작업을 명분으로 초가를 철거하고 펜스를 둘러쳐서 이런 모양이 되고 말았다는군요.”

▲ 공초 오상순 선생 묘소 전경. 오른쪽부터 시비, 상석, 돌 재떨이, 석등 순이다.

  공초 선생에게 술 한잔을 올린 후 키 큰 철쭉나무 그늘에 앉아 K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K형은 시인이면서 공초 선생 연구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공초 선생을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하여 K형으로부터 들은 그의 일대기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초 선생은 1894년 서울 시구문 안(장충동 2가)에서 목재상을 경영하는 아버지 태연(泰兗)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의동학교(현 효제초교)와 기독교 계통의 경신중학교를 마치고 1912년에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으로 유학,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집을 나와 외가에서 기거했던 그는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18년 귀국 후 YMCA에서 번역일과 교회 전도사로 활동했으며,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璧), 염상섭(廉想涉),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廢墟)』 동인이 되고, 창간호에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폐허(廢墟)』는 『창조』(1919), 『개벽』(1920), 『장미촌』(1921), 『백조』(1922)와 함께 우리나라 근대문학 발전의 초석을 놓았던 동인지이다. 1921년 조선중앙불교학림(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교명 변경. 1946년 9월 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동국대학교로 개편. 현 동국대학교) 교원, 1923년 『동명』 8호에 <방랑의 마음1>, <허무혼의 선언>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보성고보에서 영어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에스페란토어를 매개로 루쉰(魯迅), 저우쭤런(周作人), 바실리 에로센코(Vasili Eroshenko) 등과도 교유했다. 바실리 에로센코는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이며 기타 연주자다. 바하이교와도 인연이 깊어 바하이 신앙을 우리나라에 최초 전파한 미국인 아그네스 알렉산더의 한국 방문을 돕기도 했다.

▲ 공초 오상순 선생 생전의 모습. 오른손에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다. (사진 제공 건국대학교 박물관)

  1926년 범어사(梵魚寺)에 입산하여 2년간 수행 생활을 했으며, 이 무렵 공초(空超)라는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8년 대구로 내려가 잠시 주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광복 후 상경하여 안국동 부근의 역경원(譯經院), 선학원(禪學院), 조계사 등지에서 생활했다. 6·25 동란으로 부산, 대구 등지에서 피란 생활을 하다가 환도(還都)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명동의 청동다방을 무대로 유명 무명의 문인과 어울려 ‘청동시대’를 열었으며, 이때 그 유명한 낙서첩인 <청동산맥>이 만들어졌다. <청동산맥>은 통권 195호까지 만들어졌는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벅도 여기에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라는 글귀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워낙 담배를 자주 피워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 담배를 물고 있었으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고맙고 기쁘고 반갑다.’라는 인사말과 함께 담배를 권했다고 한다. 1963년 폐렴, 고혈압성심장병 등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다가 6월 3일 병세 악화로 사망했다. 문단장(文壇葬)으로 수유리 묘소에 안장되었으며 제자들이 『공초 오상순 시집』(1963)을 자유문학사에서 간행했다.

▲ 명동예술극장. 근처에 공초 선생이 주로 머물렀던 청동다방이 있었다.

  “집도 절도 없는 공초 선생이 어떻게 이곳 빨래골에 묻히게 된 겁니까?”

  “선생의 복인지 아니면 후생들의 욕심인지,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후자 같습니다만…, 아무튼 공초 선생을 따르는 후배 시인 중에 구상(具常)이란 분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에게 부탁하여 이곳에 묘소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구상 시인은 6·25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박정희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고 하더군요.”

  K형이 앞에 놓인 막걸리 한 잔을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석물들도 모두 그 당시에 세워진 것들이겠군요?”

  “아니지요. 공초 선생을 따르는 문인들은 많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들 가난한 게 문인들의 현실 아니겠습니까? 우선 여기 앞쪽에 서 있는 시비(詩碑)는 1964년 6월에 박고석 화백이 설계해 세운 것으로 글씨는 당대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쓴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여러 시비 중에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시비 건립자금은 공초 선생의 유고 시집 『공초 오상순 시선』의 인세로 책 2백 부를 받아 그 판매대금과 거기에 희사금을 보태 마련한 것이고요.”

  공초 선생의 시비를 찬찬히 들여다 보니, 앞면에는 ‘空超吳相淳碑/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나의 혼…’이, 뒷면에는 ‘一八九四年 四月 九日 서울에서 태어나다/一九六三年 六月 三日 돌아가다/廢墟誌 同人으로 新文學運動에 先驅가/되다 平生을 獨身으로 漂浪하며/살다 몹시 담배를 사랑하다/遺詩集 한 卷이 남다’라는 비명(碑銘)이 각각 새겨져 있다.

▲ 공초 오상순 선생 시비. ‘空超吳相淳碑/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보금자리친/나의 혼…’이라는 시 <방랑의 마음1> 일부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다른 석물들도 모두 같이 세웠겠군요?”

  “거참, 술은 없는데 질문은 많고, 아무튼 술이 떨어질 때까지만 대답하기로 하겠습니다. 처음엔 무덤 앞에 시비만 덩그러니 서 있었는데 해가 거듭되면서 묘소가 잡초로 뒤덮이고 봉분이 주저앉아 폐허처럼 변했어요. 원인은 장례 당일 모였던 1백여 명의 문인, 청년들이 하관식 때 무덤 안에 저마다 담배를 던져넣어 50센티 높이로 쌓였던 것이 흙을 덮은 뒤 내려앉았던 것이죠. 공초 서거 15주기였던 1978년 제사에 모였던 8십여 명의 후학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돌 재떨이와 상석, 석등이 설치되었습니다.”

  K형이 마지막 남은 막걸리를 잔에 따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시비 앞면에 새겨진 시에 대해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건 ‘방랑의 마음’이라는 시인데 1923년 1월 『동명(東明)』 18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시인으로서 공초 선생의 위치를 확실하게 굳혀준 작품이자 그의 일생을 대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걸리가 다 떨어졌으니 오늘은 여기서 그만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빨래골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가게에 다녀와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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