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민 조합원과 함께 콩나물신문에 중년신사가 찾아왔다. 장종환씨였다.

 
장종환씨는 서울 마포구청에서 37년 동안 일하고 올해 6월 말에 정년퇴직했다. 일반행적직으로 기획예산과, 자치행정과, 문화지원과 업무를 했고 염리동, 도화동, 서교동 주민센터에서 센터장으로 일했다. 공직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은 원칙주의자에, 딱딱한 인상을 풍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공무원과 대화를 하다보면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지,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건지 막막할 때가 있는데 장종환씨는 달랐다.

그가 공직에 있으며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나 잊지못할 추억이 있는지 궁금했다.
“2008년 1월에 염리동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염리동은 달동네로 주거환경이 열악해요. 뉴타운지정을 받은 동네이기도 하고요. 건물을 허물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면 원주민들은 쫓겨나게 되지요. 그래서 뉴타운은 어두워요. 사람들의 표정에도 나타나요. 그분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어요. 그래서 오래산 분들을 대상으로 일상에 대한 구술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순간을 곱씹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맑다. 장종환씨도 그랬다.
“염리동 이름 유래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발굴했어요. 염리동이 마포나루와 가까워요. 조선시대 때 마포나루에서 한양까지 소금배나 새우젓배가 들어갔거든요. 육지물건과 물물교환도 했고요. 그때 염리동이 소금창고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염리동의 ‘염’이 소금염이에요.”

염리동 사람들과 어울리며 전래동화를 듣게 되는데, 소금장수 황부자(황득업)이야기라고 한다.
“걱정과 근심이 많은 원주민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싶었어요. 구술작업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 얼마나 역사가 깊고 이야기가 넘쳐나는지를 알아가는 작업이었던 거죠.”
구술작업이 끝날 때쯤 황부자 이야기를 ‘-카더라’로 끝낼 게 아니라 연극으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컸다. 전문극단에 원재료만을 제공해 연희극을 세우는 게 아니라, 마을주민들이 참여하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주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데 공개모집을 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닐테고요.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엮어봤죠. 무대의상을 주민에게 맡겨본 거죠.”

천을 떼다가 마을 수선집에 맡겨 옷 형태를 만들었다. 옷이 너무 하얗다 해서 황토로 염색했다.
“경기도 화성에서 황토염색을 했습니다. 황토염색 체험활동을 공지했죠. 어린이들이 많이 왔어요. 어린이들이 오니까 자연스럽게 어머니들도 함께 오게 되었어요. 체험을 하게 되면 황토가 옷에도 튀고 얼굴에도 튀게 되죠. 그러다가 흙장난이 되는 거고. 그렇게 주민들끼리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연극에도 참여하게 되었고요.”

극단 민들레에서 연극지도를 도맡았다. 매번 틀리는 대사는 역할을 맡은 사람에 맞춰 바꾸기도 했다. 연극 연습을 하던 7월과 8월은 멀게만 느껴졌던 이웃이 가족처럼 지내게 된 기간이었다.
“8월 28일 서울디자인학교에서 연극을 했습니다. 그전에 어떻게 연극을 알릴지 고민했어요. 팜플렛이나 전단지는 비용에 비해 효과가 적어요. 그래서 길거리 응원단을 모집했죠. 만장기도 주민이 만들었어요. 공연 3일 전부터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죠.”

그렇게 해서 연희극 <마포 황부자>는 탄생했다.

▲ 연희극 <마포 황부자>

염리동 주민들은 연극에서 끝내지 않고 인형극도 배우게 됐다.
“염리동에 인형극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에게 8주간 연습을 배웠고 현재는 어린이집,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성희롱예방 인형극을 하고 있어요. 마을살리기를 하면서 느낀 점은 마을에 정말 많은 인재들이 있다는 거죠. 다만 그들을 발굴하고 이어가는 게 어려운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이 모든 활동들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해야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시대흐름이 그렇지 않잖아요. 단절돼 있으니까…. 공공에서는 장을 마련해주는 거고 그 다음엔 주민들의 몫인 거죠.”

염리동 이야기를 하는 내내 장종환씨는 미소지었다.
현재 염리동은 염리창조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그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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