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아버지일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와 나누셔야 할 중요한 이야기는 줄곧 일본어로 하셨다. 식민지 시절에 교육을 받으셨으니 일본어에 능통하기도 하셨지만 일본문화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던 것 같다. 유소년기의 일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집안의 내력 때문에 사뭇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선배들과 함께 보기 시작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은 기존 형성된 일본에 대한 개인적 호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한 마디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만악의 근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무한대로 커져가면서 호기심 또한 자라났다.
80년대 후반 활발했던 남한사회구성체논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역사와 우클라드 분석(우클라드: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이루는 여러 가지 경제 제도) 등으로 일본을 좀 더 객관화된 시각으로 바라볼 여지가 생겼다. 함께 했던 독서회 멤버들의 공통된 결론은 당시 대한민국 사람들의 선입견이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일본은 유구한 역사, 적지 않은 영토 그리고 경제력을 갖춘 세계적 대국이란 사실이었으며 특히 서세동점의 시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본원적 자본축적을 이룬 세계중심국가들 중의 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낡은 고정관념과 객관적 실체 확인을 위해 나는 1995년 생애 첫 해외방문국 일본으로 향했다. 하라주쿠에서 전위적인 아우라를 뽐내는 수많은 젊은이들 바로 옆에 있는 메이지신사의 인상적인 도리이와 본전 건물 그리고 상당한 규모의 해자로 둘러싸인 일왕 히로히토가 거주했다는 아름다운 왕궁을 바라보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적개심과 실체를 몰라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문명사적인 인식을 한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공부하여 바로 잡으리라 결심했지만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래서인지 최근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2.3)>을 접하고 서문을 읽자마자 즉시 구입했다. 책의 서문엔 내가 30년간 해내지 못해 무의식속에서조차 괴로웠던 오래된 숙제가 오롯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목차로.

일본의 고대사 (컴플렉스), 한국의 근대사 콤플렉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삼국시대는 사실상 오국시대
일본의 두 차례 역사 왜곡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주주국가
문화의 영향과 수용의 문제
일본속의 한국문화와 일본문화
등등,

미술사학자이자 문화학자로서 유홍준 교수는 분명하게 한국사람들만의 시각이 아닌 보편타당의 입장에서 일본문화와 그들의 성취를 정직하게 평가하고 있으며,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바른 해법 또한 제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행복했다. 침략과 수탈 그리고 민족적 억압이라는 정치와 경제의 관점이 아니라 문화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성취와 전파라는 관점에서 반도 한국과 열도 일본의 역사는 역사의 필연이었으며 또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제1권)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제2권)아스카․나라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제3권)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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