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적합하게 붙이기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어 결과적으로 한국에 광복절을 안겨준 무서운 폭탄이 있었다.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이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대학살을 학살어감이 거의 없는 ‘최종해결책’으로 불렀듯, 대학살의 주역들 치고는 꽤 귀여운 이름이 붙었다. 이 폭탄들을 두고 어떤 이들은 원자폭탄(Atomic Bomb, A-Bomb)이라 일컫고, 또 다른 이들은 핵폭탄(Nuclear Bomb)이라 호명한다. 어느 쪽이 적합한 이름일까?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여 부르느냐의 문제는 중요하며, 때로 민감하다. 미국은 북한이 ‘핵보유국’이 될세라 꽤 신경을 쓴다. 원자력보유국 여부? 아니다. 또, 사람들은 ‘핵실험’을 원자력실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핵전쟁’도 마찬가지다. 원자력전쟁이라고 지칭하는 이는 없다. 그냥 어감 차이 정도가 아니다. 두 단어는 초점을 명확히 다른 곳에 둔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배웠듯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에서 전기를 뽑거나 폭탄을 만들 때는, 원자핵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원자 전체가 아니라 원자핵과 핵의 양성자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핵분열이다. 이 핵분열 현상을 우리는 가능한 한 똑똑히 지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2011년 후쿠시마 피폭사고에 자극받아 이듬해(2012년) 광복절에 출범한 시민모임 <핵없는세상>에서는 리틀보이와 팻맨을 핵폭탄으로 부른다. 핵분열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는 곳을 핵발전소로 부른다. 포괄적으로 불러 둥글리며 넘어가는 듯한 ‘원자’라는 이름을 정확히 거부한다.

위기를 적합하게 이해하기

올해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지구환경에 대하여 과거보다 조금 더 문제의식이 높아진 듯 보인다. 산불, 태풍, 기상이변 등의 언론보도를 볼 때, 날씬한 북극곰이 빙하 위를 어슬렁거리기보다 바닷물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대할 때, 혹은 동토의 땅 시베리아가 녹는다는 소식을 들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도 많아졌다. 반가운 변화일까? 그만큼 지구환경, 특히 기후위기가 날마다 난제가 되어가고 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

기후위기(지구온난화)에 마음 쓰는 사람들은 이 위기상황의 원인이 막대한 탄소배출량 때문임을 안다. 동시에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의견을 갖는다. 바로 여기서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핵발전소를 대안으로 본다. 안전사고, 피폭사고, 핵폐기물 등에 대해선 투자를 더 늘려 기술개발을 열심히 하면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으며···.

인간이 탄소를 마구 배출하고 있을 때 숲은 이산화탄소를 성실히 흡입해주었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이빗 애튼버러 경(Sir. David Attenbourough)에 따르면, 인간이 지구를 열받게 하고 있을 때 바다는 그 열을 묵묵히 흡수해주었다. 요컨대 인간이 인간중심으로 살 때 숲과 바다가 그나마 역할을 해주어서 아직 인간멸종 시대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숲과 바다의 회복이 해결방안으로 채택, 추진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숲이랑 바다랑 인간이 어떻게 하면 함께 일할 수 있을지 궁리해야 한다. 핵발전소로 기후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 이건 인간중심으로 또다시 해보겠다는 주장이다. 인간중심적 사고가 원인이 되어 엄중한 위기가 발생했는데 인간중심적 사고로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인과관계를 적합하게 이해한 성숙한 사람이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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