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로 희망사진관 지영용 할아버지

성주로 길가에 있는 희망사진관은 늦은 밤에도 종종 불이 켜져 있다. 그 안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왜, 집이 아닌 상가에서 생활하는지 궁금했다. 다음 날 낮에 사진관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할아버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진관에 계세요?”라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어디 사는 누구요? 직장은 어디 있고? 이름은?”이라며 취조하듯 되물었다. 할아버지는 당장 얼굴을 보자고 했다.

 
지영용(72)할아버지, 박분례(71)할머니
지영용(72)할아버지와 박분례(71)할머니가 있는 희망사진관은 다방을 닮았다. 동네주민들은 할아버지에게 선풍기를 고쳐달라며 맡겨두기도 하고, 속이 상한 일을 털어놓고 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이미 벌어진 일엔 마음을 비워두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소에도 사진관 문을 잠그지 않고 다닌단다.
“작년에 도둑이 들었어. 증조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옥 반지, 옛날 돈, 오래된 한지. 골동품들만 싹 가져갔더라고. 1년 뒤에 도둑이 들었다는 걸 안 거야. 통장이며 카메라장비는 그대로 있었거든. 흐트러트린 흔적이 없으니까 몰랐지.”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낯선 전화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할아버지는, 집은 따로 있다고 했다. 집에서 식사를 하고 대부분 희망사진관에서 보낸다. 할머니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수줍게 웃었다.
“이이(할머니)가 치매가 왔어. 젊을 때 정말 현명했거든. 교회에서도 성경외우기왕으로 뽑히기도 했고, 성경퀴즈는 죄다 맞췄지. 6~7년 전부터 증상이 있었는데, 자존심이 문제야…. 혼자 속앓이 많이 했을 거야.”
할아버지가 잠깐 한눈을 팔면 할머니는 밖으로 휙 나가버린다고 한다. 여러 번, 할머니를 찾기위해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느 때보면 정말 멀쩡해 보인단 말이야. 먹는 양도 늘었어. 그러다가 실수하고…. 얼굴을 마주보면서 웃는데, 정말 아파서 그런 건지 나를 골탕 먹이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어.”
툴툴거리면서도 할아버지는, 먹기 좋게 사과를 깎아 할머니에게 건넸다.
“내가 29살 때 이이랑 만났지. 헌신짝도 짝이 있다잖냐. 만난지 한 달 만에 결혼했어.”
할아버지는 처음엔 할머니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고 한다. 그말을 듣던 할머니는 베시시 웃었다. 강화도 토박이 할머니는 교회 목사의 소개로 할아버지와 만났다. 첫만남에서도 할머니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고 한다. 그게 그렇게 답답했는데, 지금은 그 웃음이 할아버지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할아버지가 아이였을 때
할아버지는 1943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광복을 겪었고 이듬해엔 월남했다. 엄마 등에 엎혀 한탄강을 건넌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광복 후 공산, 민주가 갈린 것 아냐. 우리 부모님은 그게 싫으니까, 남한으로 내려온 거지. 이른 봄이었어. 들판에 잔디가 누랬거든. 그렇게 강을 건넜어. 젖은 옷도 널고. 돈이 물에 젖잖아. 돈을 쭈욱 놓고 말리던 생각이 나. 그땐 남북한 돈이 같았잖아.”
서울 정릉에 정착해, 정릉국민학교를 다니던 중 6.25전쟁이 났다.
“아마 6월 27일거야. 총소리도 뭐도 없는데 사람들이 동원 됐어. 미아리라고 돈암동에 다리가 있었어. 거기로 인공기를 들고 환영하러 나가라고 했어. 그렇게 지내다가 1월 4일엔 피란을 갔지.”
경기도 평택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은 일, 조치원 명동 근처에서 살며 술지게미를 먹고 산 일, 21살 유부남과 중학교를 다닌 일, 서울수복 후 다시 정릉으로 올라간 이야기, 서울운동장 휴전반대 궐기대회.
“먹을 것이 없으니까, 삼각산(북한산) 도토리 으깨서 묵 해먹었어. 엄청 떫고 써. 인민군들이 있었거든. 그사람들 키가 작았어, 얼마나 작았냐면 어깨에 맨 총이 땅을 끌었거든. 그러다가 철원도 수복되면서 다시 철원으로 돌아갔지.”

 
할아버지 청년이던 시절
할아버지는 철원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나라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신종 벼씨, 농기계, 비료, 소를 줬어. 공짜로. 그리고는 여기 부평으로 군대를 갔어. 36개월 이상 할 때인데, 28개월 군복무를 했지. 나 이후로 다시 기간이 확 늘었어. 김신조 사건이 일어났거든.”
지영용 할아버지는 제대 후 철원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농사짓는 게 힘들어 땅을 팔았다. 돈이 아닌, 쌀가마니로 거래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쌀을 방앗간에 맡겼지. 그런데 큰형이 노름으로 날린 거야. 아버지가 아니면 쌀을 꺼내올 수 없었는데, 마을이장이 큰형의 보증인으로 나섰었대. 그렇게 재산 날리고 고향 떠나 돌아다니다가 부천에 오게 되었지.”
아버지에게 카메라촬영을 배웠고 1968년 부천에 와서도 사진관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사진사가 돈을 많이 벌었지. 그런데 나는 못 벌었어. 목욕봉사도 다니고, 이웃이 수채구멍(하수구) 막혔다고 하면 뚫으러 다녔거든. 웨딩촬영 들어와도 먼저 잡힌 약속을 지켰어.”
이때까지 일들은, 자기 또래는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단다.
희망사진관에서 30년을 일한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은 고생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콩나물신문 사진강좌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할아버지는 “아직 콩나물신문을 믿지 못하겠어.”라고 한다.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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