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인문기행

조선 후기, 수락산 유람기를 남긴 지촌 이희조(1655~1724)와 미산 한장석(1832~1894)이 한자리에서 만났더라면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을 뻔했다. 이희조는 수락산 최고의 명승을 옥류동으로 보고 비록 금강산 옥류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성의 발연(鉢淵)이나 양양의 식당(食堂)과는 우열을 겨룰만하다고 했다. 반면 한장석은 수락산 최고의 명승을 은선동으로 보고, 비록 산이 높고 울창하며 물이 맑고 넓기는 해도, 이를 금강산에 가져다 놓으면 무명의 골짜기 중 하나일 뿐이라고 혹평 아닌 혹평을 했다.

총평에서도 이희조는, 가까이 있는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쓴 돌배 따러 온 산천을 헤매고 있구나.”라는 불가의 게송을, 한장석은, 생선회와 구운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하여 사과나 배를 싫어하지 않고, 삼실과 명주실이 쌓였다 하여 왕골이나 골풀을 버리지 않는 법이라는 속담으로 평가를 대신했다.

예로부터 수락산의 기암괴석은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했다. 
예로부터 수락산의 기암괴석은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했다. 

수락산은 경기도 의정부시와 남양주시 그리고 서울시 노원구에 걸쳐있는 해발 638m의 화강암 산으로, 금류 · 은류 · 옥류 · 문암 · 수락 등의 폭포와, 흥국사 · 내원암 · 석림사 · 염불사 등의 사찰, 그리고 서계 박세당 고택 · 노강서원 · 우우당 유지(遺址) 등의 유적을 품고 있다. 수락산은 평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나 대체로 산의 높이와 규모에서는 북한산과 도봉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폭포와 기암괴석에서는 두 산을 앞지른다는 평을 받는다. 앞에서 거론한 한장석이 만약 벽운동천과 깔딱고개를 넘어 수락산 주봉에 올랐더라면, “물은 비록 금강산에 미치지 못하나, 기암괴석만은 서로 우열을 다툴 만하다.”라는 평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수락산의 바위글씨. 벽운동천, 국봉, 소국, 운원수, 옥류동, 금류동, 금류동천, 수락동천, 석천동, 취승대, 서계유거 등 수락산에는 밚은 바위글씨가 산재해 있다.
수락산의 바위글씨. 벽운동천, 국봉, 소국, 운원수, 옥류동, 금류동, 금류동천, 수락동천, 석천동, 취승대, 서계유거 등 수락산에는 밚은 바위글씨가 산재해 있다.

수락산을 빛낸 두 인물, 매월당과 이병직

더구나 수락산은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시와 경서에 능통하여 천재로 불렸으나,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관직에의 뜻을 접고 전국을 유랑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는 37세 때인 성종 2(1471)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의 수락산 내원암 근처에 움막을 짓고 약 10년을 거처했다. 예로부터 아름다움은 스스로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통하여 드러낸다.”라고 했는데, 수락산이야말로 김시습으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 학자 매산 홍직필(1776~1852)은 지금의 노강서원 아래에 있었던 청절사(淸節祠)를 방문하고 나서, 그 앞에 우뚝 솟은 도봉산 만장봉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오호라, 김열경은 사람 중의 만장봉이요, 만장봉은 산 중의 김열경이로다.”

열경은 김시습의 자()이고, 청절사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이 김시습의 청절을 기리기 위해 수락산 석천동에 세운 사당이다.

수락산에서 본 도봉산. 지금의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을 예전에는 뭉뚱그려 만장봉이라고 불렀다.
수락산에서 본 도봉산. 지금의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을 예전에는 뭉뚱그려 만장봉이라고 불렀다.
노강서원.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박태보(朴泰輔)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본래는 서울 노량진에 있었으나 6·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노강서원.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박태보(朴泰輔)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본래는 서울 노량진에 있었으나 6·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또 한 사람, 수락산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인물로, 서화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송은 이병직(1896~1973)이 있다. 이병직은 서화가로, 또 감식안이 높은 문화재 수집가로 이름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교육사업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었는데, 그가 양자로 들어간 집안이 서울 장안의 큰 부자였다. 하지만 이병직은 개인적 축재보다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학교를 세우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수락산 벽운동 계곡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우우당(友于堂)이라는 별장이 있었는데 이병직은 이마저도 아낌없이 처분하여 학교의 건물을 수리하고 운동장을 넓히는 데 사용했다. 내시 출신이라는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과 동포를 위해 바친 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칭찬받아 마땅하며, 옛 우우당 터를 지날 때, 잠시나마 그의 삶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우우당은 본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 소유였으며, 현재는 옛 건물이 헐리고 그 터에 덕성여자대학교 생활관이 들어서 있다.

우우당의 옛터. 수락산 벽운동 계곡에 있으며, 옛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덕성여자대학교 생활관이 들어서 있다.
우우당의 옛터. 수락산 벽운동 계곡에 있으며, 옛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덕성여자대학교 생활관이 들어서 있다.

옥류동 폭포와 간폭정(看瀑亭)

한국산서회 제35차 인문산행팀이 찾은 곳은 수락산의 3대 폭포라고 할 수 있는 옥류폭포 · 금류폭포 · 문암폭포와 내원암, 그리고 칠성대다.

조선 효종~경종 연간의 문신이자 우의정 월사 이정구의 증손이기도 한 이희조는, 그의 아이들의 수락산 시 뒤에 붙이는 글[書兒輩水落詩後]에서, 수락산 안팎에 12개의 폭포가 있으며, 그중에서 금류동과 옥류동의 폭포가 가장 크다고 했다.

옥류폭포는 호곡 남용익(1628~1692)이 쓴 간폭정기(看瀑亭記)의 무대이기도 하다. 남용익은 16864, 이곳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간폭정이라는 두 칸 정자를 짓고 소요했다. ‘간폭정이라는 이름은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의 승구 요간폭포괘장천(遙看瀑布掛長川)에서 취했다. 그밖에도 향로봉(香爐峯) · 자연대(紫煙臺) · 장천곡(長川谷) · 비류동(飛流洞) · 천척암(千尺巖) · 은하기(銀河磯) · 구천문(九天門) 등의 바위 글씨를 곳곳에 새겼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 오늘날 남아있는 옥류동바위 글씨 2점 중 우측 큰 글씨는 이희조가 우암 송시열에게 받아서 새긴 글씨이다.

수락산 옥류폭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학동 계곡을 점령하고 있던 음식점들은 모두 철거되고, 폭포도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사진 류백현)
수락산 옥류폭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학동 계곡을 점령하고 있던 음식점들은 모두 철거되고, 폭포도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사진 류백현)

수락산의 어원에 관한 고찰

옥류동을 지나 금류폭포로 향하는 길에 수락산의 어원(語源)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들이 나왔다. 술을 좋아하는 P형은 '술악산'에서 비롯됐을 거라고 했고, 매사에 긍정적인 K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한학자인 J'물 수, 떨어질 락', 폭포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거라 했고, 시인인 G형은 이백의 망여산폭포마지막 구절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네.”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했다. 소설가인 현해당은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내가 옛날, 수락산 정상에서 석림사 쪽으로 내려가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산의 가파른 경사면이 온통 마사 흙으로 이루어져 조금만 미끄러져도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하도 부스럭거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서계 박세당의 유수락산시후서(遊水落山詩後序), 삼각산과 도봉산은 도성 인근의 우뚝한 산으로 부수락산과 더불어 솔발처럼 높이 솟아있다.(三角,道峯, 近都之雄與夫水落鼎峙而尊)라는 구절이 생각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참, 그때 마침 석림사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는데 그처럼 거룩하고 장엄한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도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저녁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만약 <수락 팔경>을 지은 정허거사였다면 분명 다음과 같은 1경을 더하였을 것입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석림사의 범종 소리

저 멀리 만장봉이 고개 숙여 합장하네

수락산 석림사 계곡. 멀리 도봉산 만장봉이 보인다.
수락산 석림사 계곡. 멀리 도봉산 만장봉이 보인다.

"그래서 수락산의 어원이 뭐란 말입니까?”

P형이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네, 그래서 제 결론은 말입니다. 수락산의 원래 이름은 부수락(부스럭)이고 이는 산에 마사 흙이 많아 걸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해당의 의견은 한학자인 J에 의해 곧 부정되었다.

 “부수락(夫水落)는 뜻이 없는 허사(虛辭)랍니다!”

수락산에는 코끼리바위, 물개바위, 곰바위, 치마바위, 배낭바위, 기차바위, 철모바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위가 있어 흡사 바위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수락산에는 코끼리바위, 물개바위, 곰바위, 치마바위, 배낭바위, 기차바위, 철모바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위가 있어 흡사 바위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금류폭포와 내원암

수락산의 어원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금류폭포에 도착했다. 이희조에 따르면 금류와 옥류라는 명칭은 각각 바위의 색이 하나는 누렇고, 하나는 흰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20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 금류폭포 상부에 도달하자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는 해서체의 큰 바위 글씨가 보이고, 바로 곁에는 주점(酒店)이 있어 한가로이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산객들이 제법 많다. 이곳은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했던 곳이기도 한데 만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봉우리가 모두 발아래 있으니 아무리 값싼 막걸리 한 잔이라도 신선의 술이 아니고 무엇이랴? 다시 내원암으로 향하는 길에 금류동천의 바위 글씨를 설명하는 표지판을 살짝 들여다보니 道光 丁酉五月이라 쓰여진 것으로 보아 1873(헌종 3)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런데 아뿔싸, 도광(道光) 정유(丁酉)1873년이 아니라, 1837년이다. 그동안 아무도 눈여겨본 이가 없었나 보다.

수락산 금류폭포. 200여 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면 바위 글씨가 있는 정상부가 나온다. (사진 류백현)
수락산 금류폭포. 200여 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면 바위 글씨가 있는 정상부가 나온다. (사진 류백현)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유서 깊은 절, 내원암은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로 명성을 누렸으나 6·25 때 건물이 모두 불탔다. 현재의 건물은 모두 새로 지은 것들인데, 대웅전 뒤에 고즈넉이 서 있는 석불이 있어 비구니 스님께 물으니 본래 내원암 계곡 한쪽에 쓰러져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 한다. 본래의 형태가 아니라 보수를 거친 것이어서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으며 제작연대는 고려말, 혹은 조선 후기로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내원암 돌부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계곡 한쪽에 쓰러져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사진 류백현)
내원암 돌부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계곡 한쪽에 쓰러져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사진 류백현)

칠성대와 은선동 문암폭포

  내원암에서 거문돌 계곡의 문암(門巖)폭포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칠성대가 있다. 천연의 화강암 바위인데 위쪽에 여러 개의 혹이 달려있어서, 흡사 15천만 년 전 쥐라기 시대의 공룡인 스테고사우루스를 보는 듯하다. 칠성대 정상에서 잠시 다리를 쉬며 산 아래를 굽어보니 저 멀리 팔당대교와 용문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사이에 형성된 도시는 첨단 무기로 무장한 군대처럼 금방이라도 산을 향해 진격해 올 기세다. 이 정도의 기세라면 앞으로 백 년 후, 칠성대 또한 어느 명망가의 후원(後苑)으로 변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수락산 칠성대. 아이를 낳은 후 북두칠성에 무병장수를 빌었던 민간신앙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사진 류백현)
수락산 칠성대. 아이를 낳은 후 북두칠성에 무병장수를 빌었던 민간신앙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사진 류백현)

칠성대를 출발하여 인적 드문 산길을 따라 한 시간여를 내려가자 마침내 거문돌 계곡이다. 마을에 검은 돌이 많아 검은 돌, 혹은 흑석동이라고 하는 이곳 계곡을 예전에는 은선동(隱仙洞)이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신선들이 노니는 골짜기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수락산의 숨겨진 비경 중 하나였다. 그 은선동에서도 백미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문암(門巖) 폭포다. 조선 시대, 많은 선비가 알음알음으로 이 폭포를 찾아 시를 읊고 피리를 불며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상류의 폭포를 바라보니, 150여 년 전 미산 한장석이 남겼던 글 그대로다.

길이 끝나려 하는 곳에 바위 병풍이 우뚝 솟아 마치 성가퀴 모양처럼 그 삼면을 둘렀고 입을 벌린 듯 가운데는 트여 있다. 큰 바위가 그 꼭대기에 시렁을 얹은 듯 들보 모양을 하고 있고 높이는 십여 장() 될 만한데 세찬 폭포가 걸려 있다.”

가뭄으로 비록 수량은 줄었으나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잠시 속세의 근심을 떨쳐버릴 만하다. 나도 문득 150년 전의 선비가 되어 물 위에 술잔을 띄워본다. 어느덧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거문돌 계곡의 문암바위. 폭포 위에 바위가 걸쳐져 있어서 문암(門巖)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진 류백현)
거문돌 계곡의 문암바위. 폭포 위에 바위가 걸쳐져 있어서 문암(門巖)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진 류백현)

제36회 (사)한국산서회와 함께하는 인문산행 안내
후원 : 월간 사람과 산

 

탐방지 : 관악산 북자하동 일원 및 삼막사
일 시 : 2020년 8월 8일(토) 오전 10시 (오후 4시 전 종료예정)
집결지 : 서울대학교 정문
준비물 : 중식과 음료수 그리고 보온의류 등

회 비 : 1만원

신 청 : 한국산서회 홈페이지 http://www.alpenbo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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