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그 집 담장 앞에 3미터 정도 꽃 피운 백일홍을 바라봅니다. “올해도 잘도 폈구나.” 지난 16년 동안 그 집 앞에 핀 백일홍을 가장 먼저 보았고, 가장 늦게까지 보았습니다. 우리 집 반려견 ‘루루’와의 16년 동행이 준 선물입니다.

 

루루는 내 딸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막내 동생이 우리 집에 데

려왔습니다. 동생이 말했습니다. 족보가 있는 개라고. 알고 보니 우리 가족과는 어울리지 않은 강남 타워팰리스에나 살아야 제격인 아주 우아하고 기품 있는 푸들 종 수컷이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집에 오면 평민(견)이 되는 거지. 딸아이가 그에게 루루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딸아이는 루루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투덜거리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루루에게 야단

치면 말도 잘 듣고, 또 내 눈과 마주치면 어려워서 시선도 피하는데, 딸아이 말에는 듣는 둥 마는 둥입니다. 눈치 파악도 족집게입니다. 계단을 오르는 가족의 발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맞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현관에 들어섰을 때 화가 난 듯한 표정이면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자기 집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환하게 웃고 들어오면 이 녀석 꼬리가 떨어질 듯 흔들면서 이 방과 저 방을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반겨주는 환영의 세레모니. 내게 어느 누가 이렇게 온몸을 던져가며 환영해 줄까요. 그 호사가 눈물겹습니다. 그러니 무슨 배짱으로 인상 쓰며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녀석은 종일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벽 6시, 자고 있는데 등이 따뜻해 옵니다. 루루와 내가 산책할 시간입니다. 녀석에게 무슨 시계 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요? 녀석은 딸아이와 함께 있다가 산책할 시간이면 내 방으로 와 내 등에 제 몸을 바짝 대고 마주 눕습니다. 그 작고 조그만 아이에게 어떻게 그렇게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는지 문득 사랑의 소중함을 체화합니다.

어느 날 오후, 이 녀석이 사라졌습니다. 딸아이가 울고불고 우리

가정은 그날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와 동네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모릅니다. 찾았습니다. 한가하게도 이웃 동네 믹스견들과 패거리를 지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비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 분노에 찬 내 모습을 보더니 이 녀석이 바닥에 몸을 딱 붙였습니다. 딸아이가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품에 안고 집에 왔습니다. 문 앞에서 내가 말했습니다. “나가!” 녀석이 미안해서 바닥에 몸을 바짝 붙입니다. 이 사건 뒤 녀석은 산책 시간 이외에는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동네 믹스견들이 루루에게 ‘그깟 일로 쫄았냐?’라고 조롱했을지 모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눈처럼 하얗던 털은 점차 누런색이 보였습니다. ‘펄쩍 - ’ 단숨에 뛰어오르던 소파에 오르다 떨어지기도 하고, 또 소파에 앉았다가 내려오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습니다.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산책길에 다른 개와 만났을 때입니다. 상대 개가 꼬리를 흔들든 으르렁대든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예전에요? 그야말로 방방 뜨고 난리 났었죠. 루루는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겁니다. “너도 내 나이 돼봐라.” 내가 지금 그날의 루루처럼 세상에 대한 무관심으로 하루하루 저물어 갑니다.

루루는 5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루루가 우리 가족에게 준 16년은 온통 기쁨과 사랑이었고, 우리 가족은 그 덕분에 바람 부는 언덕을 거뜬히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간절히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보입니다. 그 집 앞 백일홍은 해마다 6월이면 한사코 붉게 꽃 피워 가고, 우리 집 루루가 백일홍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웃고 있습니다.

남돈우(영화감독. 씨드윈 대표)
남돈우(영화감독. 씨드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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